작가는 30대에 이르른 주인공들이 학창시절에 겪었음직한 꿈과 좌절, 불안과 우울, 명랑성과 호기심을 매만지듯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소설속에선 지나간 영화, 음악, 패션, 유행, 직업 등이 '기억의 낡은 LP판'처럼 재생된다. 이런 과거의 콘텐츠들은 거부감 없이 조우할 수 있는 것들로, '빛바랜 옛날'을 추억의 축제로 만들어 준다.
"2번 버스. 그 망할 버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버스를 빼놓고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 우리 여섯명은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지 않으면 매일 그 버스에 탔다. 누구 한사람 타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 버스가 퍼져버리면 우리 여섯은 눈길을 헤치고 더 큰 길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운동화가 젖는 건 예사였다. 발가락이 얼어 떨어져나가지 않은 게 지금 와서도 다행이다. 그런 경험들이 우리를 우리로 만들었다. 2번 버스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17-19면)
겨울이 유난히 길고 안개가 자욱하던 파주에서 휑뎅그렁한 신도시 초기의 일산으로 학교를 다니던 나와 친구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2번 버스’뿐이다. 그 낡은 버스 안에서 여섯 친구는 MD플레이어나 MP3로 음악을 듣고, 전날 봤던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고, 짝사랑하는 친구 때문에 함께 아파하며 서로 의지한다. 또한 위안을 주고 받으며, 십대의 덜컹거리고 꼬불꼬불한 길을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함께 건너온다.
나는 ‘빗물에 젖으면 녹아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주완이를 ‘장난감 인형처럼 언젠가 갑자기 잃어버릴 것’만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힌 채 지낸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의 첫사랑은 어느날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파국을 맞는다. 눈 내린 파주의 겨울 산에서 주완이는 탈영병이 숨겨둔 총기로 장난을 치던 아이로 인해 사고를 당한다. 그래서 나는 첫사랑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아픈 청춘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느닷없고도 불운한 죽음 앞에서 친구들은 통곡하기보다는 긴 시간을 건너는 법을 배우며 꿈을 찾아간다. 이제 삼십대에 들어선 여섯명의 친구들은 어렸을 때의 성격과 소질을 살려 저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다가 이따금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무렇지 않게 작별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이들은 비로소 ‘안정된 음역’을 지닌 삼십대의 목소리로 편안하게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연이가 끊임없이 나와 이야기해준 게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 같다. 나의 망상을 삭제하고 삭제해 줬던 주연이는 정작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한번만 더 말해줘. 여기 쳐다보면서 말해줘. 녹화해두게. 다시는 말해달라고 안할게. 미안해.” “아니, 괜찮아. 언제든지 말해줄게. 오빠는 죽었어.” (…) 여기를 쳐다보면서,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줘. 그렇게는 부탁하지 못 했다."(186-188면)
그리곤 작가는 말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굳이 쿨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서로의 지금 그대로를 지켜주는 ‘우리’가 아름답다." 내 마음을 채우던 그 누군가가 어디에 있든 지금 여기 ‘이만큼 가까이’에서 더욱 반짝이며 손을 내밀고 있는 걸 느낀다고.
한편 정세랑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로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이 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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