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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임시정부 탐방하며 역사를 생각한다

최종수정 2020.02.11 14:03 기사입력 2014.01.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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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힘을 결집하여 체계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시대는 1932년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는 60만원의 현상금(현재 환산가치 300억원)이 걸리는 등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려는 일본의 집요한 추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는 항저우(항주)를 거쳐 전강(진강), 창사(장사), 광저우(광주), 류저우(유주), 치장(기강), 그리고 충칭(중경)에 이르기까지 고단한 행로를 이어간다. 나라의 독립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도 하고, 다시 희망을 회복하기도 하면서 임시정부는 힘겨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2014년 새해 벽두에 학생들과 함께 임시정부 이동경로 탐방 프로그램에 나섰다.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직후 조국에 돌아와 세웠던 국민대학교의 설립 취지와 역사적 배경을 되새기기 위해 경영대 및 국사학과, 공대 학생들로 탐방대가 이뤄졌다. 출발 당일 인천공항에 모인 1990년대생 학생들에게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은 머나먼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고교 시절 한국사를 배우지 않은 학생이 대다수였고, 특히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역사체험'보다는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눈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장석흥 국사학과 교수의 해설과 함께 탐방이 진행될수록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해졌고 눈빛에서 장난기가 사라져갔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먹을 것이 없어 앞집에서 버린 쓰레기를 뒤져 배춧잎을 찾아 끓여먹고, 생명을 위협하는 일제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작은 배에서 2년 가까이 생활했던 독립운동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은 현장을 답사하는 동안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제 밀정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3~4명으로 명맥을 유지했던 항저우 시절,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들어가야 하는 작고 허름한 집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출판물을 통해 항일투쟁을 계속했던 전강 시절도 답사를 통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는 시기에 따라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500여명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극소수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안창호,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이름을 기억한다 해도 그분들의 활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물여섯 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 기초를 마련한 해공 신익희 선생부터 백은식, 엄항섭, 조소앙, 차리석, 안공근 및 안경근(안중근 의사 형제) 등 우리가 마땅히 기려야 할, 그러나 잊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다. 임시정부 사료관에 전시된 사진 속 독립운동 선현들의 결의에 찬 눈빛은 '못난 후손'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리가 인천공항을 떠나던 날 역사 교과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른바 '교학사 한국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독립운동을 포함한 근현대사에서 왜곡 및 오류가 심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교재 채택 결정을 철회하는 학교가 잇따랐다. 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이한 충칭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모두 결정을 철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선현들에 대한 송구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70여년 전 목숨을 걸고 중국 전역을 떠돌며 조국을 되찾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동경로 곳곳에 삼성전자, 현대기아자동차, 한국타이어 등 한국 기업들이 진출하여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독립운동가 선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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