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빈 지갑은 미워도 금융은 미워하지 말라..어느 월가 비관론자의 역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의 신간 '새로운 금융시대'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사회고발성 다큐멘터리 영화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영화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월가를 찾아간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뉴욕증권거래소 건물과 대형 은행건물들 주위를 노란 테이프로 둘러친다. 테이프를 클로즈업해보면 '범죄 현장(Crime Scene)'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든 월가의 대형 은행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도박을 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같은 분노와 비난은 비단 영화 속의 일만이 아니다. 실제로 2011년에는 소득 불평등, 금융권의 탐욕 등에 맞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가 뉴욕에서 시작돼 전 세계 1500여개 도시로 확산됐다. 최근 로이터가 미국 성인 14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0%가 금융 위기 이후 금융업계의 개혁이 미진했고, 절반 이상이 금융권에 대한 정부의 처벌이 미흡했다고 답했다. 리먼 사태 이후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금융권'은 범죄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 분위기와는 별개로 미국 예일대학교의 로버트 쉴러 교수는 신간 '새로운 금융시대'를 통해 "'금융'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도구이며, 위기관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라고 주장한다. 무작정 금융을 비난하기 보다는 금융 시스템을 확장하고, 수정하고, 재편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금융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의 주장은 여러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서 쉴러 교수는 여러 사람에게 항의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금융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도 없다"고 본다.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비난하는 어느 누구도 선뜻 비금융자본주의 체제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 증거다. 다만 이 시스템 안에서 "금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표준을 정하고, 기업과 공공부문과 시민사회의 리더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을 정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금융의 희망을 말하는 로버트 쉴러 교수가 월가의 대표적인 비관론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케이스-실러' 주택가격지수를 고안해냈으며, 그동안 버블 형성과 붕괴, 서브프라임 사태 등 굵직한 경제현상을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2000년 그가 발표한 저서 '이상 과열'이 출간된 바로 그 달부터 주가가 폭락해 '닷컴 버블'이 종말을 맞으면서 '위기 예언자'로 명성을 날렸다. 시장이 항상 교과서처럼 이론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행동경제학의 선구자로 그는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다.
그가 분석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은 '금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다. 이를 테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집값 상승에 대한 잘못된 예측과 과도하게 낙관적인 신용평가의 문제이지 모기지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가 온전히 사람들의 탐용과 부정에만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금융기관의 근본적인 구조적 부실 때문이다. 부동산 위기를 관리하는데 실패하고 레버리지 규제에 실패한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일반 대중의 분노에 호응하여 정치인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장기적 비전이 아니라 당장 문제로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만 추진됐다."
금융(Finance)의 어원은 라틴어 '피니스(fini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의 뜻은 '목표(goal)'이다. 금융의 뜻을 협소하게 '돈 버는 기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어떤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돼야 한다. 금융의 본래 목적을 찾아주기 위해서 쉴러 교수는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각 기업의 CEO에게 주는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보상액을 재임기간이 끝나고 5년 후에 지급하자는 안이 대표적이다. 지나친 스톡옵션 보상체계는 재직기간이 짧은 CEO에게 허위 공시 등의 도덕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은행 업무의 민주화도 더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한 필수 요소로 손꼽고 있는데,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사례를 눈여겨볼만 하다. 이 은행은 마이크로크레디트(미소금융)의 형식으로 빈민과 여성에게 소자본 창업자금을 지원해 성공을 거뒀다. 쉴러 교수는 이 같은 사례가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국가에 전파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밖에 보험의 경우, 사람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려면 생명보험보다는 소득감소에 대비할 수 있는 생계 보험 상품을 만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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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총 2부로 나뉘어져 있다. 전반부에서는 기업을 이끄는 CEO, 자산운용사, 보험회사, 로비스트, 정책결정자 등의 역할과 책임을 소개하고, 후반부에서는 금융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살핀다. 단순히 금융과 경제를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금융상품이나 정책을 만들 때 "인간 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반영돼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있다. 금융의 본래 기능과 목표를 되새김질하는 데는 유용한 '교과서' 같은 책이지만 '월가 비관론자'의 신랄한 비판과 반성을 기대했다면 다소 맥 빠질 수도 있는 책이다.
(새로운 금융시대 / 로버트 쉴러 / 노지양 조윤정 옮김 / RHK /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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