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블로그]빚테크와 사라지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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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1990년대 중반까지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단어는 '재(財)테크'였다. 한자와 영어가 결합한 해괴한 일본식 용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재테크'는 경제의 양적성장과 맞물리면서 인구에 회자됐다.


재테크 열풍은 대단했다. 뻔한 월급을 크게 키우려는 개인의 욕구와 상품을 팔아야 하는 금융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부동산가격이 상승하고 은행의 예금금리가 연 10%를 웃돈 당시 경제여건도 재테크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데 한 몫 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재테크는 그새 먼나라 얘기가 돼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직장인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재테크'라는 말을 꺼내면 '도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재테크'가 떠나간 빈자리를 채운 건 '빚테크'였다. 재테크가 재산을 늘리는 수단이라면 빚테크는 부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이다. 미디어에서는 '재테크의 시작은 빚테크'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빚테크가 떠오른 이유는 간단하다. 여유 자산은 줄어든 반면 부채는 빠른 속도로 늘어난 탓이다. 빚을 내 주택과 자동차를 구매하는 게 일상화됐다. 가계부채는 2010년부터 탄력이 붙기 시작해 증가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2010년 이후 연간 100조원씩 늘기 시작해 올해에는 1000조원에 육박한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 보다 '빚을 어떻게 줄이냐'가 재테크의 핵심이 돼버렸다.


빚으로 고통을 받는 차주(借主)를 생각하면 가급적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는 '빚테크'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빚을 줄이는 식의 재테크가 과연 매달 뻔한 급여를 받는 월급쟁이들에게 진정 도움이 될까.


재테크 열풍이 불었던 20세기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아니다. 소득전선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이 상당하다. 늘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빚을 다 갚았다고 해도 '은행을 위해 일한 건가'라는 허탈함이 뒤늦게 엄습한다. 희망찾기가 좀처럼 힘든 구조가 됐다.


요즘 금융권 상황을 보면 '빚 권하는 사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금융사는 활발히 대출상품 마케팅을 펼치고 있고 정부의 경제살리기 정책 역시 대출 장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출액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부채 상환은 요원한 실정이다. 빚테크는 재테크의 핵심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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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계부채 규모가 가처분 소득을 넘어섰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부채가 소득을 웃돈다는 것은 빚 갚을 능력을 아예 상실했다는 의미다. 빚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가 구조적으로 만만치 않은 상황이 돼 버렸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직장인이라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 미래를 낙관하게 된다. 재산 증식의 기대는 사라지고 빚만 늘어가는 현 상황이 희망마저 없애지 않을까 걱정이다.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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