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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19>'조센징' 설움 딛고 열도에서 코오롱·기아車 뿌리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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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19>일본서 맨손으로 우뚝선 근대 기업가
-이원만, 신문팔이로 시작해 피복 공장 설립…이후 코오롱 세워
-김철호, 철공소서 배운 기술로 기아차 효시인 볼트회사 차려
-신격호, 첫 공장 공습으로 폐허…비누 회사로 재기한 후 롯데 키워
-김한수 한일합섬 창업자, 포목점 운영하며 주경야독…1500엔 들고 귀국
1930년대 부산항에 정박중인 부관연락선

1930년대 부산항에 정박중인 부관연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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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병합 이전만 해도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유학생을 비롯해 고작 790여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일본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한일병합 이후부터였다. 일본에서 외국인 노동자 입국 제한이 한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게 됨에 따라 한국인들의 일본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한편 한일병합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도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하면 한일병합 직후 17만여 명에 달하던 재한 일본인이 1920년에는 34만명을 넘어선데 이어, 1930년에는 50만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재일 한국인의 증가는 이런 일본인들의 한국 이주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본에서 자국민들이 빠져나간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는 한편,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의 일본 이주는 그 경위가 다양했다. 강제 연행으로 끌려간 이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유학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현해탄을 운항하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은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일본에 잔류하는 이도 많았다.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이 조성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대도 모든 게 낯설기만 한 이국에서, 그것도 차별과 편견이 심한 일본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시작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으며 민족 차별과 편견이 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갖은 인내와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됐다.

더구나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대부분 취직이 되지 않아 생계유지를 위해 자영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이른바 3D에 속하는 직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인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됐고 도전하는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활로를 개척하여 성공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장 노동자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 기술을 습득해 차별과 편견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기업을 일궈내며 산업계에 진출한 이들마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코오롱 그룹의 창업자 이원만이다. 이원만은 28세가 되던 1932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신문팔이를 시작으로 알루미늄 공장에서 일을 하며 푼푼이 모은 돈으로 '아사히공예'라는 광고용 모자가계를 개업했다. 그리고 이 가게를 시작으로 태평양전쟁 중에는 피복 생산 공장을 경영하게 됐는데 전쟁 특수 경기를 누리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 오늘날 코오롱그룹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기아자동차 창업자 김철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재일 한국인 기업인이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김철호는 18세가 되던 1923년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오사카에 정착하게 된 그는 처음 한동안 막노동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실성을 인정받아 직장 책임자의 소개로 철공소 직공이 됐다. 물론 일찍부터 그가 기계에 흥미를 가진 이유 때문이었다.

김철호는 철공소에서 7년여 동안 일하면서 습득한 기계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를 밑천으로 마침내 독립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삼화제작소'라는 자전거 부품 및 볼트 너트를 제조하는 작은 공장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때맞춰 행운마저 따라줬다.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던 시기였다. 때문에 그 또한 전쟁 특수 경기를 톡톡히 누리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해방 직전인 1944년 여름 금의환향해 오래지 않아 기아차를 창업하게 됐다.

한일합섬 창업주 김한수 역시 재일 한국인 기업인이었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한수는 1935년 부산에서 시모노세키행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오사카에 정착하게 된 그는 야간에는 고노하나상업학교에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포목상점을 경영해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 귀국하였을 땐 1500엔이라는 당시로선 거액을 들고 들어와 경남모직를 설립했다.

경남 울주에서 태어난 신격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종축 기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상급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1940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말이 좋아 일본 유학이지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우유배달 일을 하면서 와세다고등공학교(지금의 와세다대학 이공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헌데 재학 중에 누군가 자신에게 출자해준 이가 있어 창업을 했지만 공습을 받아 공장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훗날 기업가로 성장하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떠안은 부채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그는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듬해 와세다고등공학교를 졸업한 신격호는 또다시 비누, 포마드 등 화장품을 만드는 '히카리특수과학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짧은 기간 안에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과잉 경쟁으로 말미암아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화장품 대신 롯데지주 를 설립한 뒤 껌을 제조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롯데제과를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종합 제과회사로 키워냈다.

제주도 출신의 안재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3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주도민들이 밀집해 있는 오사카에 정착하면서 그는 일을 하며 오사카죠토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되지 않아, 16살이 되던 1930년 오사카합성수지화학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거기서 4년여 동안 기술을 익혔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익힌 기술을 토대로 20세 되던 1934년에 후토화학공업의 전신인 대동라이트에 입사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하며 꾸준히 배운 안재호는 다시 5년 후인 1939년 퇴사해 스스로 기업을 설립하고 나섰다.

마침내 같은 해에 오사카에서 야스모토화학공업소를 창립하면서 합성수지 가공업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야스모토화학공업소를 주식회사로 법인한 후 사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대규모 합성수지 기업으로 도약하면서 재일 한국인 기업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상호는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현해탄을 건넜다. 그의 부모는 건설 현장 등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 각지를 전전했다. 그러다 시가현에 정착해 땔감을 팔아서 생활하게 된 것은 그가 14살 때였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 교육에 열심이었던 그의 부모는 김상호를 고베고등공업학교에 진학시켰다. 졸업 후 그는 프레스 제조 공장에 취직해 프레스 설계 및 생산 공정을 2년여 동안 배웠으며 일본이 패망하던 해 퇴사했다.

일찍부터 비즈니스에 눈을 뜬 김상호는 23세에 오쓰시에서 산림업을 개업해 땔감을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활 패턴의 변화로 땔감이 잘 팔려나가지 않자 건설회사 건물을 매입해 '가네하라유리공업소'를 창업했다. 한때 오사카 역에서 파는 우유병이며 밀크·커피병을 전부 다 수주할 만큼 성공을 거뒀다.

경남 함양의 벽촌에서 태어난 박병헌은 12살 때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형들을 따라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도쿄에 정착하게 된 그는 집 근처에 있는 혼무라소학교 야간부에 진학했고, 낮에는 펄프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같이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힘든 일을 해가며 저녁에는 다시 학교에 다녀야 했던 주경야독이 그에게 학습과 단련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기도 했다. 그가 훗날 수많은 난관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했을 때 결코 굴복하지 않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그렇대도 온종일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보았자 우동 한 그릇 밖엔 되지 않았던 일당은 그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만들었고 그렇게 옮긴 일자리가 후카자와제작소였다. 그곳은 나사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 공장으로 향하면 밤늦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도 주경야독은 그만 둘 수 없었으며 어린 나이에 변변히 먹지도 못해 공장 일은 더욱 힘겨울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일한 결과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엔 형과 둘이서 힘을 모아 녹노 공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리 예측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마침 전쟁 특수 경기도 있고 해서 공장 운영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습으로 인해 피땀으로 일군 공장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해방과 함께 전문학교를 졸업하게 된 그는 망설임 끝에 결국 일본 잔류를 결심한다. 일본에 잔류하면서 동포 청년들과 함께 조선거류민단(민단) 결성에 힘을 쏟았다. 그런가하면 1973년에는 형과 함께 구로공단에 전기·전자 부품 회사인 대성전기를 설립했다.

지난 3회 때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오사카방직의 서갑호 또한 유력한 재일 한국인 기업인이었다. 서갑호는 14세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관부연락선을 타고서 현해탄을 건너가 오사카에 정착했다. 처음에 그는 오사카에 자리한 포목상점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포목 짜는 기술을 배웠다. 포목 짜는 기술을 습득한 그는 상점을 그만 둔 뒤 사탕 판매, 폐품 회수, 타월 공장에서 기계에 기름 치는 일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던 그에게 전쟁은 예기치 않은 행운을 가져다줬다. 그동안 틈틈이 모은 돈으로 군수 물자를 매매하면서 기회를 잡아가던 그는 종전 직후 폐기 처분된 방적기들을 사모아 33세 되던 1948년 판본방적을 설립한데 이어 오사카방적·히타치방적 등을 잇따라 매수하면서 일본 방적업계의 기린아로 등장했다.

한국유리공업 창업자 최태섭은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창업을 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10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최태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 아버지의 회사인 기선권농에 취직했다. 그러나 보다 큰 꿈을 안고 만주로 향했다. 당시 상업도시로 이름난 선양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던 그에게 눈에 띠었던 것은 콩과 콩기름을 이용한 가공업이었다. 거기에 착안한 그는 폐기름을 이용해 세탁비누를 만드는 '동화공창'이라는 아주 작은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동화공창에서 만든 세탁비누는 이내 선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으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33㎡ 정도에 불과하던 공장도 10배 이상으로 자꾸 커졌다.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최태섭은 자신이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점을 살려 '삼흥상회'를 설립하면서 무역업으로 눈을 돌렸다.

회사 규모는 별반 크지 않았으나 당시 만주에 진출해 있던 미쓰이, 미쓰비시, 조선질소와 같은 큰 기업들과 거래를 했다. 이들 회사가 만주에서 콩이나 콩기름을 대량으로 수거한 것을 매입해 소매로 판매하는 중개무역으로 상당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유학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혹은 중국 등지에서 맨손으로 근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이 많았다. 이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단련했던 경험은 실로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해방 직후 이들은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와 일본계 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상당 부분 공백 없이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축적한 자본과 경험을 토대로 본격적인 기업 경영에 나서면서 한국기업성장사를 써나가는 주역이 됐을 뿐더러,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작가 박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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