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성장史]⑩강철은 부서져도 고무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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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강 전하도 애용하신 고무신
-행상 이병두, 직접 상점 오픈
-일본식 제품 한국식으로 개량
-미국 주재 대리공사 출신 이하영
-대규모 공장 차리고 본격 경쟁
-일본 유학파 김연수 '별표 고무신'
-6개월 품질보장으로 히트 상품

20세기 왕조의 말기에는 비단 새로운 상인들만이 등장케 된 것은 아니었다. 인천 제물포의 개항(1883)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새로운 개화 상품에 쏠리는 관심 또한 컸다.


신통한 과학 기술로 포장돼 진기하다는 입소문까지 얻은 서구의 개화 상품들을 선점하기 위해 한성에서는 물론 경기와 충청, 황해도 등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개항장 제물포는 연일 줄을 이었다.

상인들에게는 개항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개화 상품이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개항장이 아니면 보기 힘들다는 진기하다는 상품을 구하기 위해 멀리 있는 상인들까지 돈 보따리를 싸들고서 애써 개항장을 찾았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인기 품목은 고무신이었다. 착용감이 좋고 오래 신을 수 있는 데다, 겉모양도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나 신던 갖신이나 비단신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단박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회적 평등에 목말라하는 일반 백성들의 심리적 충동까지 더해지면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일반 백성의 신발은 일부 특수한 신분을 제외하고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짚신이었다. 과거시험을 치러 한양 길에 오른 젊은 선비의 봇짐 꽁지에도 으레 짚신 네댓 켤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 마련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짚신은 너무도 빨리 닳았다. 볏짚으로 만든 탓에 기껏해야 사나흘 신을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더욱이 새끼를 비벼 꼬아 만든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비만 내리면 속절없이 물기가 젖어들어 축축해지는 데다 진흙마저 덕지덕지 엉겨 붙는 바람에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그에 반해 개화 상품 고무신은 축축해지거나 진흙도 엉겨 붙지 않아서 비가 내린다 해도 따로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일 년 정도 오래 신을 수 있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 이처럼 고무신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시장 정보를 입수한 일본의 고무업계는 우리나라에 수출할 고무신 생산에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2년 동안 일본 고베에만 약 110개의 고무신 공장이 들어섰고 그 공장에서 만든 고무신들이 부산과 인천 제물포 그리고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이런 고무신이 처음에 들어올 적부터 우리 입맛에 딱 들어맞았던 것은 아니다. 개항장 제물포를 통해 처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의 고무 단화는 '호모화(靴)'라고 해 바닥창만 고무고 그 나머지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구두 모양을 한 것이었다.


헌데 그런 구두 모양을 한 일제 고무 단화를 오늘날과 같은 고무신 모양으로 바꿔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이가 이병두였다. 평양에 자리 잡은 일본 잡화상 '내덕상회'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있던 이병두는 개항장 제물포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 일제 고무 단화가 인기를 끌자 내덕상점을 그만 두고 직접 행상에 나섰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일본에서 고무 단화를 직접 들여와 행상으로 팔면서 쏠쏠한 재미를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내친김에 고무신 상점을 내기에 이르렀고 종래에는 고무신 공장까지 차리게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거래하던 공장에 아예 수개월씩 눌러앉아 고무 배합 기술에서부터 제조 공정까지를 모두 배워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의 입맛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고무 단화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점에 착안한 이병두는 마침내 고무신 모양을 획기적으로 바꿔 내놨다.


그는 남자 고무신은 전통적인 짚신 모양을 본뜨고 여자 고무신은 앞머리가 볼록하게 솟아오른 코신을 본떴다. 폭이 좁고 굽이 높으며 발등을 덮는 일제 고무 단화를 우리 발에 알맞도록 폭은 과감히 넓히고 굽은 크게 낮추되 발등을 드러내 이른바 우리의 체질과 환경에 적합한 '조선식 고무신'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병두의 이런 조선식 고무신은 시장에 내놓자마자 시쳇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구두 모형의 일제 고무 단화를 한사코 외면하던 서민들마저 열렬히 선호하고 나서면서 잠시 선을 보였던 일제 고무 단화의 씨를 깡그리 말려버렸다.


이와 같이 조선식 고무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덩달아 고무신 공장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21년에 겨우 2개에 불과하던 고무신 공장이 1933년에는 무려 72개로 늘어났다.


생산액 또한 1920년에는 고작 4000원(지금 돈 약 4억8000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35년에는 984만5000원(지금 돈 약 1조1814억원)으로 무려 2500배나 껑충 치솟았다. 고무 제품의 95% 이상이 다름 아닌 고무신일 정도였다.


그러면서 반도고무공업사, 조선고무공업소, 서울고무공업소 등 굵직굵직한 고무신 공장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뭐니 해도 대표 주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일찍부터 영어를 잘해 일약 미국 주재 대리공사를 거쳐 법무대신까지 오른 이하영이 설립한 이 회사는 자본금 규모가 2만원에서 8만원 수준이던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자본금 50만원(지금 돈 약 600억원)에 불입자본 12만5000원(지금 돈 약 147억원)을 자랑하는 대기업이었다.


이같이 고무신 시장이 크게 확장되고 덩달아 고무신 공장들이 난립하게 되면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 또한 진풍경을 연출했다. 급기야는 업체마다 신문을 동원해서 광고 공세까지 펼치기에 이르렀다.


역시나 실탄이 넉넉한 대륙고무가 선제 공격을 퍼붓고 나섰다. 1922년 9월에 연이어 동아일보 지면을 도배한 이 회사의 광고 문구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이렇다.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의 출매함이 이왕(李王) 전하께서 이용하심에 황감을 비롯하야 각 궁가의 용명하심을 몽하며 우 여관女官 작위의 사용을 수하며….'


물론 대륙고무의 주장과 같이 국왕이 고무신을 신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신문 광고 문구에 국왕이 이용한다는 설명까지 들먹이고 나선 것을 보면 당시엔 고무로 만든 신발이 꽤 고급 상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아무튼 대륙고무가 이같이 선제 공격을 퍼붓고 나서자 이에 질세라 '만월표 고무신'이 부랴부랴 신문 광고 전쟁에 가세하며 뛰어들었다. '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이라는 신문 광고 문구로 잽싸게 응수하고 나섰다.


이강(李堈) 전하라 하면 곧 고종 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 황제의 아우였던 의친왕을 일컫는다. 1919년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일의식이 투철했던 이강 전하를 내세워 일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심을 자사 제품의 신발 판매에 연계시키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왕 전하를 앞세운 대륙고무와 이에 질세라 이강 전하를 내세운 만월표 고무신의 양대 산맥에 새로이 도전장을 던지고 나선 이가 있었다. 호남 대지주가의 27세 청년 기업가 김연수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교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상계에 뛰어든 김연수는 고무공업에 뜻을 두긴 했으나 처음부터 대륙고무와 만월표 고무신과는 차별을 뒀다. 선발 주자인 대륙고무와 만월표 고무신을 이기기 위해 전혀 다른 문법을 들고 나왔다.


예컨대 당시 국내 최대 고무공장이었던 대륙고무와 생산량이 맞먹는 규모의 공장을 일거에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공정과 원료를 혁신시켜 품질 좋은 고무신을 생산해 선발 주자를 앞지른다는 전략이었다.


그를 위해 먼저 앞서 있는 일본의 고무산업부터 살펴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갔다. 시모노세키행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도착한 김연수는 고베와 오사카에 자리한 고무공장을 두루 둘러보았다. 공장의 규모와 생산량, 원료공급, 생산 공정, 근로자의 대우, 경영상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체크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러본 요코하마공업에서 공장 설립에 관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일본의 고무산업을 두루 살피고 돌아온 김연수는 곧바로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인 기술자 야나기에게 공장 설계와 기계 설비의 배치 등을 맡기면서 고무신 생산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야나기와 호흡을 같이 하며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 반영시키기도 했다.


공장이 완공되자 고무신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고무 원료와 화학약품을 일본 고베의 무역회사를 통해 들여왔다. 생산 현장에서 일할 직공들도 선발해 200명 정도의 규모를 갖췄다. 마침내 대륙고무와 만월표 고무신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차질이 있었다. 고무신 생산이 다소 늦어져 이듬해인 1923년에야 첫 제품을 선보였다.


김연수는 첫 제품에 별표를 찍었다. '별표 고무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별표 고무신에 대한 소비자들의 첫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공정과 원료를 혁신시켜 품질 좋은 고무신을 선보였음에도, 왕가를 내세워 시장을 이미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대륙고무와 만월표 고무신의 아성은 높기만 했다.


초기 공장 건설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은 김연수의 고민이 커졌다. 어떻게든 시장을 뚫어내야만 했다.


궁리 끝에 마침내 생각해낸 것이 '별표 고무신 품질 6개월 보증 판매'라는 구호였다. 결국 공정과 원료의 혁신이라는 초심 속에서 구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그런 아이디어를 발 빠르게 홍보하고 나섰다. 이제 막 창간돼 나온 동아일보에 '반개년 보증'을 알리는 별표 고무신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고무신은 찢어지지 아니한다
고무신이 질기다함도 별표고무신을 말함이오
고무신의 모양 조키도 별표고무신이 표준이오
고무신의 갑만키도 고등품인 별표고무신'


이처럼 김연수의 별표 고무신은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대신에 소비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왔다. 대륙고무나 만월표 고무신과 같이 왕가에 줄을 댈 수 없어서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부터 자사 제품의 내구성에 초점을 맞춰 소비자들을 집중 공략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전략은 곧바로 주효했다. 왕가의 민족 감정을 상품의 내구성이 거뜬히 뛰어넘었던 것이다. 김연수의 별표 고무신은 이내 자본금 100만원(지금 돈 약 100억~200억원)으로 증자하면서 이하영의 대륙고무를 간단히 앞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무신 공장의 진화는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 가운데 '거북선표 고무신'이 단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신문 광고에다 자사의 거북선 상표가 양각된 고무신 바닥을 통째로 그려 넣었을 뿐 아니라, 신문 광고 카피 또한 직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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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일 년간 사용, 확실 보증품.
가짜 거북선표가 만사오니 속지 마시고 거북선표를 사실 때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거북선 상표에 물결 바닥을 사십시오'


거북선표 고무신은 이처럼 이중 전략을 펴고 나왔다. 대륙고무와 만월표 고무신이 그랬던 것처럼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쳐부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해 민족혼에 호소함과 동시에 별표 고무신을 뛰어넘는 내구성에다, 오돌토돌한 물결 바닥으로 미끄럼까지 방지했다는 제품의 특징을 부각시켜 우위를 점하고 나섰다. 머지않아 만개할 한국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고무신 업계의 끝없는 경쟁 체제로 벌써 그 서막을 열어젖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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