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투기꾼에는 누가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투기의 결과로 무엇을 얻었을까.
이후 프랑스로 가 미시시피 사를 설립한다. 미시시피 사는 프랑스가 보유한 미국 식민지 루이지애나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는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은행권을 발행해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무더기로 대출을 했고 미시시피의 주가는 치솟았다. 계속된 은행권 발행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미시시피의 주가를 끌어올렸다. 주당 500리브르였던 미시시피의 주가는 1719년에는 2만리브르까지 올랐다. 그러나 결국 무절제한 화폐발행과 쏟아진 차익매물로 미시시피 사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고 경제공항을 야기했다. 존 로는 프랑스에서 해임됐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살며 남은 생을 마감했다.
영국의 '철도왕'이라 불렸던 조지 허드슨은 요크 노스미들랜드 철도회사의 대표였다. 요크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린넨 천을 판매하다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자산을 이용해 요크 시의 시장이 된다. 허드슨은 1834년 '철도의 아버지'라 불리던 엔지니어 조지 스티븐슨을 만나면서 철도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42년 요크 노스미들랜드 철도회사를 설립하며 철도를 놓는 일에 매진한다. 회사 설립 2년 만에 그가 소유한 철도노선은 당시 영국 철도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5년 점정에 달했던 철도투기는 1847년 금융공황으로 이어졌다. 철도 건설 경쟁으로 요금은 낮아졌고 노선은 늘어났다. 철도 1마일당 평균 매출액은 1845년 3500파운드에서 1848년에는 2500파운드로 떨어졌다. 이는 철도회사들의 주가급락으로 이어졌다. 1848년 8월 영국의 전체 철도회사의 시가총액 감소분은 당시 영국 국민총생산의 절반과 맞먹는 규모였다. 허드슨 회사의 주가는 1845년 고점 대비 3분의 2나 하락했다. 이후 허드슨은 횡령 등 불법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채권자들을 피해 대륙으로 도망을 쳤다. 1859년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6년 뒤에는 빚을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1860년대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주식 투기꾼 다니엘 드루는 엄청난 물량의 주식을 풀어 주가를 떨어트린 뒤 헐값에 다시 매수하는 소위 '물타기' 수법으로 투기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거대한 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속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월스트리트의 스핑크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1797년 뉴욕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드루는 군대에서 탈영한 뒤 동물 몰이꾼으로 생계를 이었다. 소를 팔아 부자가 된 드루는 1850년대 초반 이리 철도회사의 이사로 선임돼 이리 철도회사의 주식으로 작전을 벌여 '투기상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드루는 주식을 거래하면서 사기를 치고 자신의 투자전략에 대해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믿었던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1873년 경제 공황 때는 전 재산을 잃고 몰락했다.
송화정 기자 yeekin77@
꼭 봐야할 주요뉴스
"하이브 연봉 1위는 민희진…노예 계약 없다" 정면...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