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편지]가을녁, 축제장에서 먹는 순대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나는 10월이 되면 마지막 주말을 무척 기다립니다.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순대'입니다. 순대란 음식이 그저 흔한 것여서 어디서나 사 먹을 수 있지만 이날 먹는 순대만큼은 다릅니다. 해마다 이맘때 여주 산북면 일대 양자산자락 마을에는 조그만 축제가 열립니다. 잣나무골과는 십여리 떨어진 곳입니다. 난 잣나무골이 속한 광주사람들보다 이곳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리는 편입니다.지자제가 실시된 이후 지방마다 다양한 축제가 시끌벅적하게 열립니다. 대부분 지자체장 치적과도 관련 있지요. 예산을 잔뜩 들인 전시축제도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여기 축제는 지역민들 자체적으로 합니다.한해동안 생산한 것들을 펼쳐놓은 일종의 추수감사 같기도 하고 그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단합대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자체도 신경 쓰지 않고, 주민들도 크게 지원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흥겨움만은 최고입니다. 각설이 패도 몰려와 가위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올해로 7회째를 맞은 '품실제'입니다. 양자산 아래는 두개 마을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상품리와 하품리입니다. 헌데 하품사람들이 싫어하는게 있습니다. 농산물 포장박스에 '하품리'라고 표시하는 겁니다. 하품사람들은 "우리 농산물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래도 생산지가 하품이니 속 상한다"고 항상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상품사람들이 하품사람들에게 그해 농산물을 모아놓고 축제를 벌이자고 해서 만들어진 잔치입니다. 장소는 상품리입니다. 그렇게 모인 농산물은 모두 상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참으로 지혜롭고도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이름이 '品實'인 까닭이지요. 품실제에는 산나물, 버섯 등 모든 농산물이 다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지역 특산물인 버섯, 치커리김치, 고구마는 손 꼽아줍니다.
올해도 10월초순부터 축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아주 작은 축제판이나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합니다. 여느 축제판 못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순대는 일품입니다. 축제장에는 마을 부녀회들이 모여 먹거리장터를 운영하는데 순대가 여러 품목중에 꼭 끼어 있습니다. 여기 순대는 부녀회가 밤새 만들어 즉석에서 쪄줍니다.약간 짠게 흠입니다. 대신 소금이나 새우젖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먹는 순대란 식당의 비닐껍질같은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선지에 파, 마늘 등 양념을 버무려 속을 채우고, 쫄깃한 돼지막창으로 만들어 맛이 일품입니다. 요즘 그런 맛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친구들과 몰래 시장통 식당 2층 골방에서 1000원짜리 순대술국에 150원하는 소주를 먹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공범였던 식당 남자주인도 생각납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털이 덥수룩한 그는 한때 건달로 유명했다고 떠버리던 사람였습니다. 공부 못한게 후회된다고 항상 투덜거렸습니다. 숨어서 먹는 순대맛이란...그동안 사는게 자꾸만 맛있는 순대와 멀어지는게 되고, 나이도 어느덧 중년을 넘어서려 합니다. 또 무엇인가 멀어질 것처럼 느껴집니다.
처음 품실제가 열리던 날 나는 그곳에서 바로 그 순대를 먹게 된 것이지요. 이태전인가는 오후 늦게 갔다가 헛걸음 한 적 있습니다. 순대가 떨어져 무척 실망스러웠지요. 워낙 인기가 많아서입니다. 부녀회가 소속된 마을 사람들은 공짜로 먹습니다. 부녀회는 팔 것과 마을사람 나눠먹을 걸 감안해서 준비하지만 해마다 일찍 떨어집니다.
올해도 맛있는 순대를 먹을 수 있어 행복한 가을날입니다. 순대를 먹는 동안 나도 축제판의 한사람입니다. 도시생활이라면 절대 맛볼 수 없는 잔치판입니다. 나는 지난 2002년에도 그런 순대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축구경기가 있던 날, 마을사람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함께 응원했었습니다. TV와 빔을 설치하고, 멍석을 깔고 신나는 판을 만들었습니다. 노인들의 사물놀이, 응원하는 함성소리가 어울려 초등학교 운동장도 광화문 광장 못지 않았습니다.
그날 청년회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부녀회는 삼겹살로 숯불구이를 하고, 뼈다귀는 해장국을 끓이고, 곱창은 순대를 만들어 마을사람들을 대접했습니다. 나와 아이들도 신나게 먹고 놀았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부녀회장은 순대 두 덩어리나 싸줘 집에 와 실컷 먹었던 적 있습니다. 순대는 내가 잣나무골에 와서 풍성한 삶을 만들어준 음식입니다. 그 순대를 먹을 때마다 나도 이곳주민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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