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잣나무골편지]내게는 너무 넓은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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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방학 끝날 무렵

아이들 여름 방학이 끝났다. 여름 내내 아이들과 같은 얘기만 반복했다.


"이제 다 컷으니 살 궁리를 해라. 기술 배우는게 최고다"

옆에서 하도 부추겨서일까 ? 고 2 딸이 무너졌다. 기어이 딸애는 학교 졸업하고 제빵 기술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개학하자마자 엄마랑 빵 만들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라. 네가 만든 빵을 먹고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중3인 아들은 자꾸 대답을 미룬다.


"아들아. 내가 보기엔 자동차 정비공이 제일 멋있을 것 같다야."


묵묵부답이다. 아직 시간이 많은 아들에게는 덜 강압적인 언사를 동원했다.


"책이나 많이 사줘. 읽고 싶은거 맘껏 보게."
"그려라. 그건 아깝지 않은 것 같다"


또 여름이 갔다. 그새 아이들도 부쩍 컸다.


◇ 우리집 정원


우리 집 정원은 무진장 크다. 수해 복구하는데만 3주가 걸릴 정도다.
주변사람들이 묻는다. "수해 복구 잘 돼 ?"
나는 3주째 복구가 다 안됐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그랬다. 잣나무숲에서 토사가 밀려 들어 마당 한편과 상수도를 덮쳤다. 삽질로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포크레인 등 장비를 들이대는데 무려 3주가 걸렸다. 곤지암 일대는 수해로 상가지대는 물론 하천, 논밭 등이 누더기로 변하면서 장비가 동이 났다.


우리 차례가 오는데 한참 걸렸다. 복구하려니 포크레인을 세번을 불러야 했다. 헌데 그게 3주나 걸려 세번을 나눠서 들어왔다. 7월말 폭우가 내린 이후 광복절이 지나고서야 모두 복구할 수 있었다. 배수관작업, 집 주변과 야산 배수로 작업, 상수도 및 정화조 복구 등으로 3주를 보낸 셈이다.


그래서 질문이 올 때마다 "아직도"라고 한 답변이 "마당이 얼마나 크길래 여지껏 마무리를 못 하느냐"는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나도 얼마나 큰지 몰라. 조금만 복구하재도 기본이 3주야.ㅋㅋㅋㅋㅋ"
"크 !!"


어쨌든 내 마당은 이번 폭우로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 새벽 옹달샘에


8월초 여름 휴가가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는 날 비가 내렸다. 집안에는 여전히 수도가 끊긴 채였다. 일어난 시간은 4시10분. 세수하려면 텃밭가의 옹달샘까지 가야한다. 씻으려니 온 몸이 젖을 판이다. 결국 나는 발가 벗고 어둠속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엄청 차가왔다. 옹달샘쪽의 외등이 고장나 불빛도 없다. 또한 창문 너머 불빛도 닿지 않는 시각지대다. '이게 무슨 절묘한 일이냐 ?'


더듬거리며 물 바가지를 끼얹어 간신히 씻었다. 발가 벗고 어두운 마당 귀퉁에서 목욕하는 꼴이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새벽이라서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휴가 동안 나와 아들은 마당에 나와 똥을 쌌다. 아내와 딸은 아침녁 목욕탕에 들러 씻기도 하고 큰일을 봤다. 작은 일은 화장실에서 보고 옹달샘에서 물을 길러다 부어 해결했다. 한낮에는 아내와 딸이 옹달샘을 수십번 왔다갔다 했다. 빨래하고, 그릇 씻고, 쌀 씻고......현관에서 옹달샘까지 마당 한복판으로 오솔길처럼 단단하고도 반질반질한 길이 하나 더 생겼다.


가끔씩 아옹다옹하거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샘가에서 잣나무골로 가득 퍼졌다. 둘은 좋은 친구가 됐다.


◇ 잡초 우거진 밭


오랫만이다. 모처럼 잣나무골에 햇살 비쳤다. 일하러 텃밭으로 나섰다. 산들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왔다. 가을 빛이 완연하다. 여름 내내 손볼 수 없었던 텃밭은 잡초가 무성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호박, 참외, 고추 뿐이다. 그나마 열매를 맺지 못하고 덩쿨만 뻗다가 말라가는 중이다.


고추는 잦은 비에 꽃도 못 피우고, 몇개 달렸던 열매도 붉기도 전에 쏟아졌다. 잎은 햇빛이 비치자 시들시들 힘이 없다. 나의 한 친구는 '비가 와도 식물들은 더 푸르른데 인간의 손을 거친 작물들은 왜 이리 연약한가'라고 시름을 토했다. 하여간 잡초는 강하다.어디서나 용감하고 씩씩하다. 그에 비해 작물은 모두 비루하다.


더 늦기전에 김장배추와 상추를 심을 작정이다. 난 서둘러 잡초를 걷었다. 참으로 무심한 여름이다. 가을이 오기전에 아무런 결실을 거둘 수 없게 됐다. 그저 풀만 걷는 심정이 아리다. 그러면서도 흙이 발바닥에 닿자 온몸이 근질거렸다. 처음엔 무성한 풀을 낫으로 쳐내고 삽질을 하려다 하나하나 뽑아 나갔다.


'오랫만에 보는 흙맛이구나' 온몸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자 가뿐한 느낌이 절로 든다. 옥수수대를 뽑고, 참외덩쿨을 거둬냈다. 양파밭에서는 악취가 풍겼다. 양파 수확하던 날 중간에 비가 퍼부어 캐낸 것들만 자루에 담고 철수했다가 나머지 수확하는 걸 잊었다. 그새 다 썩어 냄새를 풍겼다. 고구마밭은 더욱 참담했다. 잡초속에서 전혀 줄기조차 뻗지 못했다. 풀을 뽑아내는 동안 줄기 전체가 딸려올라와 신경을 곧두세워야할 지경였다.


고구마밭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나자 가녀린 줄기 몇개가 연약하게 늘어져 있다. 문득 감상에 빠졌다. 내 인생이 벌써 가을녁이다. 4막 중 3막이다. 헌데 4막이 이 가을 같으면 허망할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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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벌레 소리


밤이 시끄럽다. 반딧불도 사라지고, 개구리 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 여치, 귀뚜라미 등 풀벌레소리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들에겐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남지 않은 까닭이다. 더 늦기전에 사랑을 찾으려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참으로 즐거운 가을 밤이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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