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1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그를 만나 들어본 6.25는 너무도 생생하고 또 아팠다. 정씨의 얘기는 수 십년 전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전쟁미망인 정씨의 모진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정씨는 육군본부 행정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근무처에 여자라곤 정씨와 동료 단 둘. 월급은 6만원이었다. 입에 풀 칠 하고 방 세 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지만 그나마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게 정씨 설명이다.
정씨는 “저는 그래도 중학교까지 졸업을 해서 사무직으로 근무할 수 있었지만 당시 미망인이 된 젊은 여성들 대부분이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었다”며 “결국 이들은 행상, 공장노동 등 고된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정씨는 육군본부에서 1984년까지 일하고 정년퇴직했다.
정씨는 “당시 서울은 유난히 춥고 비도 많았는데 여름에는 하수도가 터져 삼각지나 마포 지역은 매번 물에 잠겼다”면서 “전쟁의 공포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졌겠는가. 참혹했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그냥 살았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재가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 조차 안 해봤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남편 때문이다. 그는 “올해로 남편 잃은 지 58년이 됐는데, 아직도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다”며 “남편이 눈 감는 것도 못 본 게 한으로 남았다”고 토로했다.
전쟁미망인이라는 글자가 꼬리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정씨는 “지금도 내 이름은 '전쟁미망인'이다. 가슴에 명찰을 달고 산 셈이다. 농담으로 미망인씨 어디 가셨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어 “미망인들의 삶은 대부분 절절하다. 남편이 죽고 나서도 시댁에서 떠나지 못하고 시집살이를 당해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58년이 지났지만 미망인의 뇌릿속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씨와 같은 한국전쟁 미망인은 아직도 이땅에 3만5000여명이나 남아있다.
조유진 기자 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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