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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망인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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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유진 기자]1929년에 태어난 그는 전전(戰前·6.25 발발 이전)세대의 맏언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스물 한 살 때 참혹한 전쟁을 겪어낸 그는 전쟁 자체와 이에 따른 고통을 간직한 마지막 증인이 될 지도 모른다. 그는 그래서 걱정이 크다고 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후세에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해줄 사람이 몇 안 남게 되기 때문이다. 6.25가 잊혀진 전쟁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면서까지 세월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그는 6.25 때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 정금원(82·사진·대한전몰군경 미망인회 강남지회장)씨다.

6.25 61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그를 만나 들어본 6.25는 너무도 생생하고 또 아팠다. 정씨의 얘기는 수 십년 전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7월25일 충북 단양. 정씨 앞으로 얇은 봉투가 하나 배달됐다. 남편의 전사통지서였다. 7사단 3연대 2대대 육군 중대장으로 참전한 남편이 서울~경주 진격전 과정에서 포격으로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정신이 빠진 것 같이 어리벙벙했다. 6·25가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남편과 만나 결혼을 했던 정씨다. 정씨는 그렇게 전쟁미망인이 됐다. 결혼 한 지 꼭 일 년 만에 맞은 일이었다. 멍한 상태로 1년을 지냈는데,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마저 홧병을 못 이겨 사망했다.

이때부터 전쟁미망인 정씨의 모진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정씨는 육군본부 행정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근무처에 여자라곤 정씨와 동료 단 둘. 월급은 6만원이었다. 입에 풀 칠 하고 방 세 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지만 그나마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게 정씨 설명이다.

정씨는 “저는 그래도 중학교까지 졸업을 해서 사무직으로 근무할 수 있었지만 당시 미망인이 된 젊은 여성들 대부분이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었다”며 “결국 이들은 행상, 공장노동 등 고된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정씨는 육군본부에서 1984년까지 일하고 정년퇴직했다.
워낙 깊은 시골마을이라 전쟁통에도 비교적 조용했던 단양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을 때 정씨 눈에 처음 들어온 광경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현재의 서울역 근처 도로에는 포격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있었고, 도로 중앙에는 전쟁난민이 돼버린 주민들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공동수도관과 양동이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관리인에게 5원을 주면 양동이 2개 분량의 물을 채워 날라주는데, 양동이 한 통으로 서너명이 하루를 버텨야 하는 실정이었다.

정씨는 “당시 서울은 유난히 춥고 비도 많았는데 여름에는 하수도가 터져 삼각지나 마포 지역은 매번 물에 잠겼다”면서 “전쟁의 공포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졌겠는가. 참혹했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그냥 살았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재가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 조차 안 해봤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남편 때문이다. 그는 “올해로 남편 잃은 지 58년이 됐는데, 아직도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다”며 “남편이 눈 감는 것도 못 본 게 한으로 남았다”고 토로했다.

전쟁미망인이라는 글자가 꼬리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정씨는 “지금도 내 이름은 '전쟁미망인'이다. 가슴에 명찰을 달고 산 셈이다. 농담으로 미망인씨 어디 가셨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어 “미망인들의 삶은 대부분 절절하다. 남편이 죽고 나서도 시댁에서 떠나지 못하고 시집살이를 당해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58년이 지났지만 미망인의 뇌릿속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씨와 같은 한국전쟁 미망인은 아직도 이땅에 3만5000여명이나 남아있다.



조유진 기자 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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