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조직이 이긴다"는 검사모임
[아시아경제 박현준 기자] 내야할 세금을 내지 않고 오히려 나라 곳간에서 돈을 타가는 교묘한 범죄 집단이 있었다. 한 해 그 규모만 2조원대에 이른다는 이 해괴한 사건을 두고 가슴앓이를 하는 검사들이 있었다. 그것이 동기가 돼 학습모임을 만든 지 1년 6개월만에 잘못을 바로 잡아내는 쾌거를 이뤘다. '조세판례연구회' 모임을 꾸리고 있는 검사들이다.
"...그래서 저희가 파기 환송심에 가더라도 다수 의견에 따르면 승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김영진 법무관)
"OK, 파기 환송심에 가서도 마무리를 잘 해야겠지. 국세청에서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겠지?"(강경필 서울고검 송무부장)
"네, 알고 있습니다"(김 법무관)
25일 오후3시 대검 302호 송무부장실. 강경필 송무부장(검사장)을 비롯해 김영진 법무관, 김동선 법무관, 추창현 법무관, 석지윤 법무관이 '금괴 부정거래 전원합의체 판결분석'이란 발표 자료를 두고 분석을 하고 있었다. 고정 멤버인 황재화 법무관은 외할머니인 박완서 작가의 부음을 듣고 이례적으로 빠졌다. 이날 세미나의 주제는 약 5700억 원에 이르는 조세 판결 결과 분석이다. 최근 대법원에서 기존 판례를 깨뜨리고 고검 송무부의 손을 들어준 사건이다. 이날 검사들의 모임은 금괴수출업자들이 금괴를 수출할 때 앞서 낸 세금을 돌려받는 점을 악용해 계산서만 끊고 내지도 않은 세금을 정부에서 받아챙기는 짓을 찾아내 응징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머리가 희끗한 '호랑이 선생님'인 강 검사장은 승소의 공을 법무관들과 조세판례연구회에 돌렸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정부가 2008년에만 2095억원에 이르는 27건을 졌어요. 엄청난 세금입니다. 그냥 놔둬선 안 되겠다 싶어서 판례를 다시 바꿀만한 새로운 논리가 뭐냐고 따져봤지요. 평소 법무관들과 함께 조세판례연구 세미나를 열었던 게 도움이 됐어요"
조세판례연구회는 2009년 8월 출범 당시부터 금괴 탈세 사건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다뤘다. 주요 업무 담당자였던 김영진 법무관을 포함한 연구회에서 소송 서류를 검토했다. 정부가 그동안 왜 졌는지를 따져가며 소송에서 이길만한 논리를 찾아갔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정부 패소에 따른 조세포탈의 파급효과도 함께 분석해 수십 건의 자료를 제출했다. 추 법무관은 "조세관련 소송은 형사소송과는 다른 측면이 많다는 점을 강 검사장님에게서 많이 배웠다"며 모임 출범 당시를 회상했다. 연구회는 소송을 진행하면서 발표문을 모아 620여쪽에 이르는 '조세법판례연구'란 연구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합쳐진 결과, 지난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금괴수출입업자가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국세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정부 편을 들어줬다. 연구회의 주장을 따라 판례가 변경됐다는 뜻이다. 배우는 조직이 이긴 것이다. 김영진 법무관은 "영국에서도 사기거래(carousel fraud)로 다루는 문제"라면서 "이번 소송에서 쟁점이 됐던 제도가 유럽연합의 지침을 들여온 것임을 법원에 설명하고, 유럽의 법리를 한국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논리를 짰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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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가 변경되자 말수가 드문 강 검사장조차 연구회에 "고생이 많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연구회 회원들 역시 그 동안 강 검사장의 숨은 배려와 따뜻함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강경필 송무부장(검사장), 김영진 법무관, 김동선 법무관, 추창현 법무관, 석지윤 법무관 등 '조세판례연구회'가 25일 고검 송무부장실에 모여 판결문 분석을 하고있다
강 검사장은 25일 세미나를 통해 다시 한번 긴장의 끈을 조였다. "일부 나쁜 수출입 업자들 사이에서는 알루미늄, 컴퓨터 칩, 섬유 등을 부정거래해 나랏돈을 빼먹는 수법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판례변경으로 금괴를 이용한 범죄는 이제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범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괴에서 알루미늄, 컴퓨터 칩, 섬유로 대상만 바꿔가며 정부 곳간을 축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영업정지로 물의를 빚은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인 신삼길(53)씨도 이런 방법으로 재산을 쌓았다. 그는 얼마전 금괴 부정거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50억원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연구회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번씩 세미나를 열어가며 공부를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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