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위기관리' 공식 만들었던 양재봉 명예회장 타계

[아시아경제 강미현 기자] '큰 大 믿을 信'의 선구자

한국 증권업계의 산증인이자 금융 선구자로 평가받는 고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이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25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고 양 명예회장은 월급쟁이 은행원으로 출발해 대신증권을 대신경제연구소, 대신개발금융, 대신투자자문 등을 거느린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시킨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양 명예회장은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현재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사하면서 금융계에 첫발을 내밀었다. 한국 전쟁 직전에는 외자 관리청 목포부소장을 지냈고, 전쟁 직후에는 석유저장공사 목포출장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

그의 행보가 늘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20대의 기개로 과감히 추진했던 양조사업은 자금난에 봉착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전 자산을 모두 팔아야만 했다.

양 회장이 본격적인 금융업 경영자로 나선 것은 70년대 초, 한일은행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단자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1973년 미원그룹 임대홍회장, 해태제과 박병규사장 등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한 후 그는 1975년 중보증권을 인수했다. 그리고 대신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킨다.

고 양재봉 명예회장

이후 1977년 대신증권 사장 취임 4개월 만에 영업부장이 일으킨 금융사고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장자리에서 물러나는 아픔도 겪었다.

그의 본격적인 성공스토리는 3년 간의 와신상담 끝에 1981년 대신증권 사장직에 복귀하면서부터다. 당시 대신은 자본금을 모두 까먹고 자본잠식상태로 껍데기 뿐인 회사로 전락해 있었다.

양 명예회장은 이때 결단을 내렸다. 증권업의 전망을 밝게 본 그는 당시 잘나가던 대한투자금융 주식을 미원 임회장에게 넘기고 대신 대신증권 주식을 추가로 인수,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오늘의 대신 신화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그는 타고난 근면성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회사재건에 앞장섰다. 마침 1980년대 중반 증시활황이 불어왔다. 그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대신증권은 마침내 증권업계 선두대열에 나서게 된다.

그는 위기관리에 특히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말 펀드열풍이 불면서 다른 증권사들이 20%대의 고금리 회사채를 편입한 채권형 수익증권을 무차별적으로 판매하고 있었고, 시중의 자금은 증권사로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양 회장은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의 판매를 전면 중지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안가 대우그룹 부도, 하이닉스 사태가 연이어 터지며 이들기업의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는 대규모 환매사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대신증권은 안전한 국공채를 편입한 수익증권만 판매한 덕에 손실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현재 며느리인 이어룡 회장과 손자이자 최대주주인 양홍석 부사장(대표이사) 등의 일가가 대신증권을 이끌고 있다. 시장에서 대신증권은 다소 보수적이지만 리스크 관리가 철저한 안정적 증권사로 통한다. 이는 고 양 회장이 남긴 유산 중 하나다.

강미현 기자 gr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