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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이 자리에 제가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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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학교의 모습은 그냥 참담한 것 같아.”

“어른들은 얘기하지. 그냥 3년 공부해서 대학에 잘 가면 된다. 나도 그래왔고, 전부 잘 해 내더라. 너도 할 수 있다. 이런식으로 말이야 ”
“하지만 웃겨. 모두 등수에 쫓겨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 이런 현실을 완화시킬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난 슬퍼. 얼떨결에 대학에 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가 더욱더 대한민국 교육을 바꾸는데 힘써야 된다고 생각해.”

“내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오로지 수능에만 관심이 있는 거야. 학생들의 생각은 거의 무시하고 대학만가면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키지.”

“하지만 그 학생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 지도해 주는게 요즘 학교에서는 드문 일인 것 같아.”
“우리의 수업방식은 너무 딱딱한 나머지 이해를 시켜야할 과목도 무조건 암기과목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거야.”

“요즘의 학교는 학생들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수능시험을 잘 치고, 학교에서 내신을 잘 받아야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에 잘 갈수 있지. 공부를 못하면 가기 싫은 대학, 자신에게 맞지 않는 전공도 택해야 하고…이것은 잘못됐다고 봐.”

“성적을 떠나서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면 해.”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이런 대화내용을 보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K대학 J교수님의 블로그였고, 교수와 학생들이 우리의 교육현실에 대해 온라인상에서 오간 내용들이었습니다. 교수와 학생들간 부담없이 한 토론이었고, 일부를 발췌한 것이지만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너무 잘 함축한 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J교수가 학생들과 이런 대화를 한 시기는 2008년 4월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훨씬 넘은 지난 6월 미국의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정말 쇼킹한 일이 있었습니다.

Coxsackie-Athens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수석 졸업한 에리카 골드슨(Erica Goldson)양의 고별 연설이었습니다. 이 연설은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에 뿌려졌고,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현재 미국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고발한 연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고등학교 졸업생이었지만 미국의 교육현실, 교육철학의 빈곤, 경쟁만 조장하는 잘못됨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스스로를 반성하듯 화두를 던져 경종을 울렸고, 이를 듣는 순간, 그것은 바로 우리교육의 현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의 고별연설 일부를 발췌해 봅니다.(번역, 블로거 krysialove) 2년여 전 블로그에 올려진 우리나라 교수-학생 간의 대화내용과 비교하며 읽어보시죠.



<전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면서 딜레마에 부딪혔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시험이니, 석차니, 모두들 어떤 목표를 세워 놓고 학습에 임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단지 목표 달성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할 뿐이니까요.

아마 이런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니, 시험도 무사히 통과하고 졸업생 대표까지 맡게 되었으면 뭔가 배웠을 것 아니냐?”

네, 뭔가 배우긴 했겠죠. 하지만 잠재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 지명,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일자 같은 것들을 외우고, 시험이 끝나면 또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머리속에 입력된 지식을 지우고… 학교 역시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은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자”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 목표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졸업하거든요. 게다가 수석이라는 영예까지 얻었으니, 즐거워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동기생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결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들을 잘 해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학교의 세뇌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는 공로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제 가을이 오면 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제가 직장에 들어가서도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증서(대학 졸업장)를 따내기 위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일꾼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 사고하는 인간, 그리고 모험을 하고 싶은 인간입니다.



일꾼이라는 것은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시스템이 준비해 놓은 체제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 말입니다. 저는 이 노예들 중에서도 최고라는 사실을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아주 잘 해냈습니다.

수업시간에 경청하지 않고 노트에 그림 연습을 했던 동기생들은 나중에 위대한 화가가 될 지도 모르지만, 수업시간에 열심히 필기를 한 저는 어느 누구보다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과 후 자신이 읽고 싶은 책들을 읽느라 바빴던 동기생들은 다음 날 숙제를 해오지 못해 혼났지만, 저는 한 번도 숙제를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작곡과 작사에 열중하는 동안 저는 학과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따기 위한 특별활동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 수석이 되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쳤을까? 네, 물론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긴 합니다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제가 고등교육을 마치고 나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헤매게 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설계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분야에서 남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분야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매달렸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지금 두렵습니다.

저는 이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개성을 억누르는 세상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합니다. 기업과 물질주의가 요구하는 비인간적인 난센스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변화를 요구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나중에 자동화될 수도 있는 일, 불필요한 일, 열정도 없고 의미도 없는 노역과도 같은 일을 하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교육 시스템은 우리에게 열정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돈이 동기부여가 되는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열정이 동기부여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기 보다는 훈련시키려고만 하는 시스템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열정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슬픈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저처럼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업과 정부로부터 권위에 순종하는 사회의 일꾼들이 되기 위한 세뇌교육을 충실하게 받고 있으며, 이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살아온 지난 18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보다 나은 교육 시스템을 가진 나라로 도망가서 다시 배울 수도 없습니다. 제 유년 시절은 이미 막을 고했고,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저랑 똑같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손에 놀아나 잠재력을 억압당하는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아침 이상희 국립과천과학관장이 좋은 칼럼을 썼군요. 우리의 교육열이 OECD국가 중 최고이지만 학생들의 창의력은 분명 하위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창의성이 가장 중요한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과중한 주입식 학업스트레스가 정신마저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막오른 취업시즌. 많은 기업들이 기존의 틀을 깨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원합니다. 끈질긴 승부근성과 실천력을 중시하는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창의력과 넘치는 패기-이런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신입사원으로 선택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기업들 입장에선 당연히 그런 인재를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열린 사고, 창의력, 열정과 실천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교육현장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제임스 캐머런. 이들은 공교롭게도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부(富)를 창출했고, 명예를 얻었고, 지구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다.

교수-학생 간 온라인 대화,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고교 수석졸업생인 에리카 골드슨 양의 고별연설을 떠올리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 봅니다.

혹시 주입받은 내용들을 자동적으로 내뱉도록 훈련된 로봇처럼 살아오지는 않았나? 시스템이 준비해 놓은 체제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을 즐기고 있지는 않았나? 매일같이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일꾼에 머물지는 않았나? 로봇처럼, 노예처럼, 반복적으로 일하는 일꾼처럼 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주역은 아니었나?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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