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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 성남의 추억과 모라토리엄

최종수정 2020.02.11 14:18 기사입력 2010.07.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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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城南), 산성 남쪽의 마을. 이름은 옛스럽고 안온해 보인다. 금고가 두둑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떵떵거리며 초호화 청사를 지은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 성남시가 지난주 돌연 빚을 갚지 못하겠다고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부자의 파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필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있는 법이다. 돌아보면 산성과 산성자락 도시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치욕과 분노가 있었고, 도전과 영광, 성취도 있었다. 이번 모라토리엄 선언도 굴곡진 산성의 역사가 지나가야 할 필연의 수순일까. 산성과 도시의 역사 속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치욕. 궁궐을 버린 왕이 성 안에 들었다. 신하와 군사가 따랐다. 그들은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사를 이겨낼 수 있을까. 헐벗은 백성을 구할 수 있을까. 조선의 왕 인조는 그럴 힘이 없었다. 성 안에 들어온 지 47일째 되는 날 왕은 남한산성 서문을 걸어 나왔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단상의 청나라 황제를 우러러 왕은 소복에 맨발로 섰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백성을 살릴 수 있는 하나뿐인 선택이었다. 그 자리에 커다란 표지석이 섰다. 삼전도비다.

#분노. 1971년 8월10일. 남한산성 서남쪽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앞. 서울시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철거민이 대부분인 광주단지 입주민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배고파 못 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땅 값을 내려라" 성남출장소가 불타고 차량이 뒤집혔다. 경찰지서도 부서졌다. 공포의 폭력사태는 6시간 동안 계속됐다. 개발연대의 가장 아픈 상처로 기억되는 '8ㆍ10 광주단지 소요사태'다. 서울시가 1969년부터 청계천변 등지의 판자촌 난민을 남한산성 계곡 아래에 집중 수용한 곳이 광주 대단지다. 1971년 봄에는 인구가 20만명에 육박했다. 극한의 환경에서 빈민세대가 일으킨 '민란'이었다. 소요사태 다음 날 정부는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성남출장소를 시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한다. 오늘의 성남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성취. 1980년대 말 3저 호황으로 부동산 경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고나면 아파트 값이 뛰었다. 기획부동산이 준동하고 복부인들이 투기에 불을 붙였다. 정권이 흔들거렸다. 급기야 1989년 세계에 유례가 없는 5개 인공 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됐다. 하이라이트는 성남 남단녹지 1782만㎡(540만평)에 세워지는 인구 42만명 규모의 분당신도시. 정부는 '제2의 강남'을 약속했다. 성남이 철거민의 도시에서 일약 전국 10대 도시의 반열로 도약함을 알리는 축포였다. 40여년 전만해도 산성 아래 변변한 이름도 없었던 곳. 그런 성남이 분당을 안고 지금 인구 100만명에 육박하고 1.2인당 자동차 1대 꼴의 부자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좌절. 뿌리없는 도시 성남의 주민들을 처음 향토애로 묶은 것은 '성남소녀 임춘애'다. 그의 곤궁했던 성장기와 철거민 시절의 애환을 오버랩시키면서 주민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그의 성취와 성남의 성장을 견주면서 박수를 보냈다. 그랬던 성남시가 초심을 잃고 초호화 청사를 지었다니. 벼락출세나 벼락부자의 원초적인 한계일까. 대선캠프 주변을 맴돌다가 한 자리 차지하면 쥐꼬리만한 권력을 휘둘러대는 자들이나 산성자락의 66㎡(20평) 택지에 울고 웃던 시절을 잊고 혈세로 3000억원 짜리 호화 청사를 짓는 꼴이나 피장파장 아닌가.

#반전? 성남이 모라토리엄의 수모를 딛고 다시 반전의 역사를 쓸 것인가. 성남인들의 숙제다. 황량한 산성 자락에서 지금의 대도시를 일궈낸 사람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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