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100년-미래경영3.0 창업주DNA서 찾는다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①
1951년 日서 삼경물산 설립 53년 국내 첫선
장난감 뱀 들고 박정희 설득 구로공단 태동
당당한 성격·탁월한 입담 일본인까지 감동


[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나일론(Nylon)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느 집 여인네들이나 옷을 짓고 꿰매느라 밤샘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도와 섬유산업에 종사하고 1953년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상륙시켰으니 돌이켜보면 새삼 할 만한 일을 했구나 싶다."

1992년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은 고희(古稀)를 맞아 발간한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에서 나일론을 도입했을 당시 심정을 이 같이 밝혔다.


이동찬 명예회장과 그의 부친 오운(五雲) 고(故) 이원만 회장은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처음 도입한 장본인들이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6.25 전쟁 직후 헐벗고 굶주렸던 국민들에게 의식주 관련 사업은 정말 필요했다. 한마디로 '헐벗은 우리 국민, 옷 좀 잘입고 살자'하는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나일론 사업을 하게 된 명분에는 보다 실리적인 배경도 있었다. 오운 이원만 회장이 6.25 전쟁 직후 벌였던 사업이 바로 나일론과 관련된 일이었다.


오운은 6.25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재일교포 경제단체인 재일한국인 경제동우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사업 기회를 엿보던 오운은 1951년 일본인과 합작해 삼경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한일간 교역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1952년 말 오운은 나일론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일본 미쯔이(三井)의 한 직원이 찾아와 내보인 게 바로 나일론이었다. 나일론은 질기고 윤기가 흐르고 세탁하면 금방 말라 당시에는 '꿈의 섬유'로 불렸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나일론 붐이 불었다. 오운은 한국에서의 성공을 확신하고 1953년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기자간담회와 입소문을 타고 나일론은 국내에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1954년 12월 오운은 우리나라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를 개소했다. 그리고 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서울사무소 대표를 맡겼다.


오운은 사업수완이 매우 좋았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시작은 29세 때인 1933년. 가족을 모두 고향인 포항에 남기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부터 갖은 고생을 겪은 오운은 오사카에 아사히공예(旭工藝)사를 차리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사업 아이디어는 간단했지만 수익은 대단했다. 당시 일본의 공장 직원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일했는데, 작업 도중 쇳가루가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오운은 챙이 달린 작업모를 쓰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공장이나 상품 이름을 인쇄한 광고모자를 착안했다. 이후 오사카 공장 여기저기서 수주를 받는 사업수완을 발휘하면서 사업을 키워갔다.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도 생전에 오운의 아이디어를 당대 최고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전봇대와 철로의 침목을 나무 대신 시멘트로 바꿔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오운이 낸 것으로 전해졌다.


또 오운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다.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와 제스처를 사용하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들인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의 배짱과 기술은 작달막한 키에도 불구하고 마을 씨름판에서 여러 번 황소 코를 꿰잡던 '밀어붙이기' 실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술회했다.


우리나라 수출입의 모태인 구로공단도 그의 화려한 입담에서 비롯됐다. 1963년 6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기업인의 모임인 '코리아 하우스 회동'에서 오운은 제조업과 공업단지 창설의 필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장난감 대나무뱀을 박 의장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에서 이런 것도 만드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 가내공업이라도 해서 경기를 부양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1시간으로 예정됐던 이날 모임은 오운의 화술에 빨려들어 3시간을 넘겼다는 후문이다.


고(故) 이정림 대한유화공업 회장은 "이원만 회장이 친화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면서 "코리아 하우스 회동 덕분에 이 회장은 최고회의와 의장 공관을 아무 제지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명예회장도 "아버지는 화술이 뛰어났다. 논리라기보다 표정, 정열이 더욱 설득적이었다"고 술회했다.


표정과 정열로 설득한 사례는 또 있다. 구로수출공단 창립위원장을 맡은 오운은 입주 기업 유치가 지지부진하자 자비로 일본행에 올랐다. 구로공단에 재일교포 기업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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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은 일본에서 재일교포 기업인 부부모임을 갖고 조국에 투자할 것을 호소했다. 고향과 모국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기업인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보였고, 함께 참석한 일본인 부인들도 훌쩍거리며 행사장은 그야말로 울음바다가 됐다. 한국말로 한 설명에 일본인들이 울었다는 것은 남편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운의 표정이 슬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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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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