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사람들] 4. 박지원 민주당 의원
1983년 미국 망명길에서 만나 30여년간 그림자 수행
국민의 정부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 특검서 무죄까지 DJ와 생사고락
투병→입원→서거까지 50여일 병세 철통보안..20여년만 국장(國葬) 성사
광주.전남 지역민에 대한 DJ의 애틋한 심정 "다음 기회가 있을 것"
$pos="L";$title="사본-박지원 서거발표";$txt="";$size="372,563,0";$no="200908251525152524143A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2009년 8월18일 오후 1시43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훌훌털고 일어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속보가 전파를 타자 장례식장 건물 6층에 마련된 임시기자실이 취재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DJ의 병세와 서거 이후의 상황을 취재하고자 하는 언론들의 경쟁적인 취재활동에도 불구하고 동교동계가 선언한 일체의 함구령이 끝까지 지켜진 셈이다. 본지 역시도 여러차례의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야 했던 아픔이 있던 터라 서거후 이어질 특집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우려돼 앞이 깜깜해졌다.
이제는 대언론 창구역할을 해 온 박지원 민주당 의원(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기대가 산산조각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료진이 서거발표를 하리라던 당초 예상을 깨고 그가 서거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은 박 의원이 보안의 최일선에 있던 장본이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석달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발표때와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에는 의료진이 서거발표 후 가족들이 뒤를 받치는 형식이었다.
2주일여 가량 취재해 오면서 병원측의 '횡보상태'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를 그때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음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며칠전부터 미음을 공급받고 있다는 의료진의 언급이 있은 후로는 병세 호전 소식만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었지만 청천벽력같던 서거소식은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다.
$pos="R";$title="박지원-DJ(최종)";$txt="";$size="301,1083,0";$no="200908251529022616601A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입원하시기 전부터 50여일간 초조와 불안 속에 지냈다. 한밤중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며 회한에 잠겼다.
병세가 그대로 언론에 노출될 경우 쾌유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이희호 여사와 가족들에게 누(累)가 될 게 분명했고, 진료에 집중해야 하는 병원측에도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허나 실제 보안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기에 동교동의 창구역할을 담당해 온 그가 홀로 감내해야했던 고통은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소통부재의 청와대에 매일같이 DJ의 상태를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했던 그의 정치력에 경의감마저 들 뿐이다. 국내외 방문객을 맞이하느라 매순간 멈춰 있는 그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그도 인간인지라 공식 서거를 알리는 기자회견전 그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그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 만큼은 분명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했다. 20여년만에 치러진 국상(國喪)을 유족의 요구대로 간소하지만 엄숙하게 치러지도록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가 진정한 DJ의 사람임을 짐작케 하는 자그마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갑작스럽게 당으로부터 정책위의장 부름을 받아 하루에도 몇번씩 당과 병원을 오가며 눈꼬틀새 없이 지내야 했던 어느날 밤,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 현관에 모습을 드러낸 박 의원은 예의 기자들 앞에 둘러싸이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비서진의 논리에 병원측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헌데 집요한 추궁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준비된 원고를 읽어내려가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1973년 8월8일 괴한으로부터 납치돼 일본의 한 호텔에 감금된 지 정확히 36년째 되는 날이었던 것. 온몸이 꽁꽁 묶여진 채로 바다에 던져지려던 순간 극적으로 구조돼 닷새만에 가족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 사건은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군사정권의 치밀한 계획하에 자행된 만행이라는 것이 드러나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박 실장은 정확히 36년전 사경을 넘나들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듯이 예전처럼 이틀 후면 이희호 여사 곁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고, 우리는 마치 최면에 걸린듯 그의 말에 빨려들어간 것이다.
박 실장은 DJ 서거후 프레스룸에서 가진 첫 공식 브리핑에서도 "마지막 돌아가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편안하셨다"면서도 "며칠전부터 너무나도 편안하셔서 저희들은 건강의 기적이 날 줄 알았다"고 실제 부활을 간절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후일담이지만 영결식을 국상(國喪)으로 치뤄지게 하고, 전직들과 달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시키는 일련의 절차는 박 의원의 사전구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결국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북측의 조문단 파견도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에서건 시기하고 질시하는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실제 동교동계 내부에서 박 의원의 독단적인 일처리를 마뜩치 않게 여기는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동교동계 좌장격인 권노갑 전 의원과 언쟁까지 벌여 갈등을 빚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상당기간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공황이 오지 않겠냐"고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거 이틀전 DJ의 차남 홍업씨와 권 고문과 만나 장례절차와 방식, 안장처 등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관철시킴으로써 갈등이 기우(杞憂)에 불과했음을 시사했다.
박지원과 DJ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DJ는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구속된 뒤, 각계의 탄원으로 가까스로 미국 망명길에 올라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다. 여기서 김경재 전 의원의 소개로 DJ와 박 실장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전남 진도출신인 박 실장은 홀홀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한인총연합회장까지 역임하는 탄탄대로를 걷던 재미사업가였다. 가혹하게 탄압받던 야당인사를 따라나서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남북문제에 대한 확고한 그의 신념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급기야 1987년엔 미국생활을 접고 DJ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국내 정치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5년만에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발탁된 이후 DJ의 언론관계 업무를 도맡아 순발력있는 위기대처능력을 보여주었다.
4년1개월간 최장수 야당 대변인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속에서 그가 내놓는 논평은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집권여당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광복이후 50년만에 처음으로 이룩한 평화적 정권교체로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이 된 그는 이후 문광부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으로 국민의 정부의 시작과 끝을 DJ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에서는 이런 그를 벌써부터 '포스트 DJ' 반열에 올려놓고 향후 정국을 가늠하는데 활용코자 하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몸을 한껏 낮추고 있다. 추모기간이 채 끝나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설화(舌話)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는 우(遇)를 범할 경우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죄를 지을수도 있다는 현실을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자신보다도 DJ를 위해서 살아온 과거 행적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수긍이 갈 것이다. 실제로 대북송금특검으로 구속된 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에 이르기까지 이루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음에도 수감될 당시에는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 구절을 인용하며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는 말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면때에는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며 DJ의 뜻을 받들고자 처절하게 인내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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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난 18대 총선에서 DJ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목포에서 무소속임에도 압도적 지지로 당선돼 부활의 염(念)이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줬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기 전 박 실장에게 남긴 유언에 DJ가 목숨보다 더 사랑한 광주.전남 지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다만 "여러가지 말씀이 있었다"면서도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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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일보 김선환 기자 shkim@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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