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대신 고양이, 예금 대신 SNS…유언장에 일상 남기는 2030
자필 유언, 법적인정 요건도 '깐깐'
10명 중 8명 "유언 작성방법 몰라"
"남겨진 이들 위해 유언 작성해야"
"집에 있는 슬램덩크 만화책 전집을 자녀에게 물려주세요. 처음으로 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라 소중하거든요. 엄마와의 추억도 있고요."
30대 닉네임 '꿀연필'씨의 유언장 한 구절이다. '특별히 물려주고 싶은 물건'을 묻는 말에 누군가는 고양이 두 마리를 남편에게, 누군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친구에게 남겼다. 죽음을 연습하는 이곳 '유언장 작성 모임'에선 부모와 배우자, 친구에게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이 유언장 위에 꾹꾹 눌러 담긴다. 20대 닉네임 '가비'씨는 "'내 새끼들 잘 부탁해'라는 한 문장만 남기고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며 "남겨진 사람들이 저처럼 깊은 상실감에 빠지지 않도록 제 얘기를 남겨놓고자 가입했다"고 말했다.
지역생활 커뮤니티 당근마켓에서 진행 중인 유언 작성 모임 참가자들이 자필 유언장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재구성한 이미지. 챗GPT 생성 이미지
이 특별한 모임을 만든 이는 '모임장' 최고운씨(43)다. 3년 전 미혼이던 이모의 사후 처리를 맡으며 유언장의 중요성을 절감한 최씨는 2023년 11월부터 이 모임을 운영해왔다. 지역생활 커뮤니티 당근마켓에서 참가비 1만원에 총 10회 진행되는 모임은 벌써 9기를 맞았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은 아직 59명뿐이지만 앞으로 1000명의 유언장 작성을 돕는 것이 최씨의 목표다. 최씨는 "사망신고가 되면 고인의 은행계좌, 카드, 보험, 주식 등 금융자산은 모두 동결된다"며 "그래서 오히려 가족은 모르는 '나만의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매년 수십조원 규모의 자산이 이동하는 '대상속 시대'를 맞았지만, 유산과 달리 유품과 디지털 기록 등의 처리 방식을 정리하는 '유언장 작성'은 여전히 낯선 풍경이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 남겨진 이들의 혼란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유언장 작성 문화를 정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지난달 29일 기준 5조1836억원으로 집계됐다. 2020년 말 9000억원 수준이던 시장은 5년 만에 약 6배 규모로 커졌다. 유언대용신탁은 종이 유언장 대신 금융기관에 재산을 맡겨 계약 내용에 따라 재산을 이전하는 방식이다. '사후(死後)'를 준비하려는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의미다. 국세청에 따르면 재산을 물려주려는 피상속인 수 역시 2020년 1만1521명에서 2024년 2만167명으로 75.0% 증가했다. 국내 총상속재산가액 역시 같은 기간 27조4138억원에서 47조254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문제는 '돈'의 상속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법에 대한 사회적 준비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데 있다. 실제 국내 유언장 작성 관련 통계는 2020년 국내 금융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2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하나금융연구소의 설문조사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제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응답은 1.7%에 불과했다. 반면 '작성 방법을 몰라 보류했다'라거나 '작성 방법을 몰라 아직 작성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85.0%에 달했다.
대다수 청년층은 거액의 부(富)를 축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언 자체를 자신과 무관한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주서연씨(26)는 "부든 명예든 사회적으로 이뤄놓은 게 없다 보니 유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고, 그래서 제 물건이나 SNS 계정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도 없다"고 털어놨다. 구예은씨(26)는 "대학 교양 수업 때 유언장 작성법을 배운 적은 있지만, 너무 복잡해 쓸 생각은 못 했다"며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평소에 잘 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다"고 했다.
유언장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데는 1958년에 멈춰 있는 까다로운 법적 요건도 한몫한다. 현행법은 자필·녹음·공정·비밀·구수증서 등 다섯 가지 방식만 인정한다. 가장 흔한 자필 유언조차 내용과 날짜, 주소, 성명을 모두 손으로 직접 쓰고 날인까지 해야 한다. 위·변조를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컴퓨터로 작성한 뒤 서명만 하거나 주소 일부를 빠뜨리면 유언 전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디지털 기기와 종이 없는 문서 처리에 익숙한 세대에겐 어렵고 번거로운 방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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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물건과 삶의 흔적들을 사후에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자필 유언장의 일상화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준우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소액 재산이나 일상의 유품이라도 자필 유언장이 없으면 사후 남겨진 이들의 행정적·법적 소모가 상당하다"며 "그렇다고 유언장의 엄격한 요건을 무작정 완화하면 치매 노인을 겨냥한 유언장 대필 문제 등이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속 갈등을 줄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유언장 작성 문화 자체를 대중화해야 한다"며 "유언장 작성·보관 지원도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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