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 안 사면 벌금 500만원"…'소방관 사칭 전화 사기' 기승
4만원짜리 주방 소화기 '100배' 뻥튀기
전남도지사 명의 '위조 공문'까지 동원
식당 주인 기지로 '피해' 간신히 막아
"소방 점검 나갑니다. 400만원짜리 소화기 안 들여놓으시면 당장 벌금 500만원 나와요"
식당 안이 점심 손님들로 유난히 북적이던 18일 낮 12시 20분경. 전남 완도군 군외면 원동리에 위치한 '원동기사식당'의 업주 A씨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압적인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소방 당국 관계자라고 밝힌 남성은 마치 죄인을 취조하듯 당일 '오후 4시 예고 점검'을 통보하며 식당 주인을 거칠게 압박해 왔다.
최근 전기차 화재 등으로 소방 안전에 대한 사회적 불안감이 고조된 틈을 타, 전남 전역에서 전남도지사 명의의 위조 공문까지 동원한 신종 '소방관 사칭 전화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식당이 가장 바쁜 시간대를 노려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든 뒤 수백만 원을 갈취하는 수법으로, 이미 전남 인근 시·군에서는 실제 돈을 뜯긴 피해 사례가 속출해 수사당국이 비상에 걸렸다.
"처음엔 40만원, 결국엔 400만원"…벌금 폭탄 앞세운 '가스라이팅'
사칭범들의 범행은 자영업자의 심리를 흔드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전개됐다. 이들은 점심 장사로 정신이 없는 낮 12시와 1시 사이를 범행 시간으로 조준했다.
처음에 사칭범은 식당 업주 A 씨에게 "최근 강화된 소방 규정에 따라 40만원짜리 소화기를 구입해야 한다"며 가볍게 운을 뗐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본색을 드러내며 "자세히 확인해보니 2세트를 포함해 400만원 상당의 고가 리튬 이동식 소화기 구입이 필수 항목"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 "당일 오후 4시 점검 때 이 제품이 비치되어 있지 않으면 즉시 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처음에는 비교적 낮은 금액으로 경계심을 푼 뒤, 결국 수백만 원짜리 장비를 사지 않으면 벌금 폭탄을 맞을 것처럼 영세 자영업자를 거칠게 겁박한 것이다.
사칭범들이 식당 업주에게 범행 과정에서 확신을 주기 위해 문자로 전송한 '전라남도지사' 명의의 위조 공문. 하단에 적힌 번호는 국가 지원금 환급을 미끼로 송금을 유도하는 사기 조직의 연락처로 확인됐다. 이준경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당황한 A씨를 향해 사칭범은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제품 가격이 400만원으로 고가이지만, 국가 지원금을 활용하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감언이설이었다. 사칭범은 "우선 400만원을 선입금해 물건을 구입해 두면, 국가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전액 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집요하게 계좌 송금을 종용했다.
위기의 순간 빛난 업주의 현명한 대처…인맥 활용 '100배 부풀린 사기' 간파
심리적 압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칭범은 확신을 주기 위해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로 '전라남도지사'의 이름과 공식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공문 사진을 전송했다.
공문 하단에는 또 다른 관계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고, 사칭범은 "이 번호로 통화하면 국가 지원금을 환급받는 구체적인 행정 절차를 알려줄 것"이라며 피해자를 완벽히 안심시키려 했다. 관공서의 공식 직인을 눈앞에 두고 의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칫 눈뜨고 코가 베일 뻔한 400만원 사기극을 멈춰 세운 건 업주 A씨의 냉철하고 현명한 대처였다. A씨는 사칭범의 거센 압박과 도지사 공문에 당황하지 않고, '관공서가 유선으로 특정 업체의 선입금을 요구하는 점'을 수상히 여겼다.
A씨는 즉시 평소 소방서에 근무하던 지인에게 연락을 취해 "오늘 오후 4시에 도지사 공문으로 내려온 불시 소방 점검이 정말 있느냐"며 꼼꼼하게 사실관계를 교차 검증했다.
지인 소방대원을 통해 완도소방서에 확인한 결과, 이는 전남도와 소방본부 모두 발송한 적이 없는 '100% 위조 공문'으로 밝혀졌다. 특히 소방서 측은 "일반 식당 주방에는 화재 안전 규정상 4만원 안팎의 주방용 'K급 소화기'만 정상적으로 비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일반 식당 주방 화재 안전 규정상 필수 비치 품목은 4만원 안팎의 '주방용 K급 소화기'(왼쪽)면 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칭범은 최초 40만원 상당의 소화기 구입을 유도했으나(가운데), 총 4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리튬 이동식 소화기'(오른쪽) 구매를 필수라며 강제 통보했다. 이준경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사칭범들이 4만원짜리 필수 설비를 무려 100배나 부풀려 400만원짜리 고가 장비로 강매하려 했던 셈이다. 당황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소방 인맥을 활용해 팩트를 체크한 A씨의 기지 덕분에 '원동기사식당'은 가까스로 사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사칭범들 일제히 잠적…소방 당국 "식당 업주처럼 철저한 확인 거쳐야"
본지 취재진은 위조 공문에 적힌 번호와 A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사칭범들의 연락처로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이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일제히 연락을 끊은 채 잠적한 상태다. 범행 요건이 어긋나자 흔적을 지우고 도주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형적인 행태다.
박석호 완도소방서 안전팀장은 "정식 소방 점검은 반드시 사전에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으로 통보되며, 어떤 경우에도 소방서나 도청이 특정 업체를 지정해 선입금을 요구하거나 현장에서 벌금으로 위협하는 일은 결코 없다"며 "이번 원동기사식당 업주처럼 의심스러운 전화를 받았을 때 곧바로 입금하지 않고 소방 당국에 직접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자세가 최고의 예방책"이라며 대처 사례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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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당국은 아무리 도지사 직인이 찍힌 공문과 벌금 폭탄으로 위협하더라도, 유선상으로 돈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사기임을 인지하고 즉시 전화를 끊은 뒤 119나 관할 소방서 대표번호로 신고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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