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배출, 일자리보다 2배 많아
"포닥 5년 넘기면 생존의 문제"
25년간 누적된 공급-수요의 역전
단기 정책으로 해결 불가능한 '구조적 늪'

편집자주과학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실제로 이공계 대학원생 수와 연구개발(R&D) 투자는 수치상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 현장에서는 대학원 미충원, 길어지는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 정적만 흐르는 지방 연구실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이번 연재를 통해 '과학자가 왜 사라지는가'라는 질문을 따라가 봤다. 과학자가 오래 남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정책과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해법을 찾아봤다.

박사학위를 받아도 독립 연구자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현실의 젊은 연구자들은 학위 취득 후에도 1~2년짜리 계약직 연구를 반복한다. 안정적인 연구직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갈수록 좁아지고,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포닥) 기간은 과학자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생존의 늪'이 되고 있다.

한때 대학원생과 연구원들로 붐볐던 지방 대학 연구동 복도. 박사급 인력 공급은 늘고 있지만 안정적인 연구 일자리는 줄어들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김종화 기자

한때 대학원생과 연구원들로 붐볐던 지방 대학 연구동 복도. 박사급 인력 공급은 늘고 있지만 안정적인 연구 일자리는 줄어들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김종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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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에 걸쳐 서서히 뒤집힌 공급과 수요의 곡선

박사급 인력 자체는 계속 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에 따르면 이공계 박사과정 재학생은 2021년 3만 3018명에서 2025년 3만 7526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들을 수용할 정규 연구직 자리는 제자리걸음이다.


수급 불균형의 실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추적하는 '시계열 분석'을 통해 더 극명히 드러난다. 수십 년간의 데이터를 늘어놓고 그 궤적을 쫓아보니 우리 과학계의 허리가 어떻게 휘어왔는지 그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데이터 분석 결과 1991~1995년 R&D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 증가 규모(1만 7443명)가 실제 배출된 이공계 박사(6716명)의 2.6배에 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1996년부터 박사급 일자리 증가 규모가 배출 인력보다 서서히 적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2016~2020년에 이르러서는 배출된 박사 인력 수가 신규 일자리 규모의 약 2배에 달하는 완전한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과학자가 사라진다]②박사학위 뒤에 '1년 계약서'만 남았다 원본보기 아이콘

주목할 점은 이 역전이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게 아니라 지난 25년에 걸쳐 서서히 누적된 결과라는 점이다. 공급·수요 곡선이 사반세기 동안 천천히 어긋나며 구조적 결함이 고착화됐다. 이는 현재의 위기가 단발성 정책이나 단기간의 예산 투입만으로는 되돌리기 어려운 깊은 늪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포닥 4~5년 차, 연구 이탈의 임계점"

현장 연구자들은 특히 '포닥 4~5년 차'를 가장 위험한 시기로 본다. 김추강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 경력성장실장은 이 시기에 대해 "단기 계약 반복으로 고용 불안이 극에 달하는 동시에 결혼·출산 등 생애주기적 비용이 급증하는 때"라며 "비자발적 연구 이탈이 이 시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독립 연구자로 안착하지 못한 채 포닥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학계가 인력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다는 신호이자, 젊은 인재들이 연구 연속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과학자가 사라진다]②박사학위 뒤에 '1년 계약서'만 남았다 원본보기 아이콘

실제로 연구직 안착에 실패한 '고학력 무직' 비중은 늘고 있다. 통계청이 집계한 2024년 국내 신규 박사학위 취득자 조사에 따르면 무직 상태인 박사 비율은 29.6%에 달했다. 2014년 24.5%에서 지난 10년간 꾸준히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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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계 이동은 기회인가 위기인가…'기초과학의 공동화'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분야 기업들이 박사급 인력을 과거보다 많이 흡수하고 있지만, 이 같은 흐름을 긍정적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박사 인력이 기업으로 이동하는 것은 산업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어도 학계는 불균형 문제를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 연구개발 분야는 비대해지는 반면, 미래 원천 기술을 담당해야 할 대학과 출연연의 기초 연구 분야는 인력 수급에 난항을 겪는다. 투자와 일자리가 산업계에 쏠리면서 학계 연구 생태계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기초과학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위험이 커진다.


김 실장은 미 국립보건원(NIH)의 생의학(Biomedical) 분야 경력개발 지원 프로그램인 'K-어워드(K-Award)'를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로 들었다. 물론 이는 생의학이라는 특정 응용과학 분야에 국한된 프로그램이지만, 신진 연구자가 독립 연구자로 안착할 수 있도록 장기간 연구비와 경력개발을 패키지로 지원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도 단순 성과 중심 평가를 넘어 연구자의 생애 전체를 지원하는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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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 이준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미래인재정책국장은 "연구자가 연구에만 전념하며 생애 주기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두터운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면서 "단기 계약에 매몰되지 않고 젊은 연구자가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력 구조를 만드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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