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없는 여행이 남기는 감정의 잔상
심은경, 서사 대신 정서로 관객 끌어들여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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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여행과 나날'은 겉보기에 사건이 없다시피 하다. 갈등은 미약하고, 인물 변화도 크지 않다. 대신 영화는 두 계절을 건너는 여행의 리듬과 풍경의 온도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큰 서사보다 정서와 분위기를 앞세우는 방식이다. 이 미니멀한 구조가 영화의 핵심이다. 미야케 감독은 서사의 여백을 감정과 정조로 채우며, 여행이라는 경험이 가진 근본적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주인공 이(심은경)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다. 어느 날 삶의 속도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잠시 일터를 떠나 설국의 작은 마을을 여행한다. 그것은 도피도, 특별한 전환점도 아니다. 세계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며 숨을 고르는 과정에 가깝다.

미야케 감독은 여행지를 화려한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인물이 느끼는 작은 감정의 떨림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한다. 이와 마주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그의 삶을 흔들기보다, 짧은 시간 감정의 잔상을 남긴다. 만남이 사건이 되지 않고 스쳐 간다.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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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시선은 관광객도, 현지인도 아니다. 두 위치의 중간에서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보인다. 눈앞의 세계를 그저 감정의 파동으로 받아들인다. 풍경이 가진 온도, 타인의 말투와 침묵, 계절의 변화는 마음의 결로 이어진다. 미야케 감독은 이 삶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느낌과 감각을 차분하게 기록한다.

이 작품은 만화가 츠게 요시하루의 단편 '해변의 서경'과 '눈집의 벤씨'를 기반으로 한다. 츠게의 작품들은 목적이나 갈등을 전면에 세우지 않는다. 인물은 부유하고, 사건은 단절된다. 내면의 미세한 감정이 중심이라 실사화하기 어렵다. 만화의 여백과 멈춤을 영화로 번역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미야케 감독은 난제를 계절의 리듬이라는 해석으로 풀어낸다. 원작의 내면적 진동을 계절의 변화로 치환하고, 단절된 컷의 느낌을 인물의 여정과 우연한 만남으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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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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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감정의 층위는 심은경의 몫이다. 일본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며 외부자와 내부자의 경계를 오간 이력은 이의 정체성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심은경은 작은 표정 변화와 절제된 동작으로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과장 없는 움직임과 미세한 눈빛의 흔들림은 영화가 의도하는 정조와 정확히 맞닿고, 화려한 장치나 극적인 서사 없이도 관객을 조용히 끌어들인다. 삶의 리듬을 다시 살피게 하는 작은 여백으로 안내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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