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텅빈 무대 가득 채운 낭만·의리…복수극이 경쾌하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10주년 공연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역설적으로 경쾌한 복수극이다. 곳곳에 허를 찌르는 웃음이 가득하고, 영달을 추구하기보다 의(義)를 지키고 낭만을 좇는 인물들이 등장해 극의 잔혹함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진나라 주군 영공과 그가 가장 믿는 두 신하 도안고와 조순이 등장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도안고는 "죽을 날이 멀지 않을수록 욕심은 더 늘어납디다"라고 말하는 인물로 정적 조순을 제거하려 한다. 조순의 집안은 도안고의 모함에 9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한다. 하지만 도안고가 마지막까지 없애려 했던 갓난아기, 조순의 손자 조씨고아는 조순 집안의 문객 정영의 기지와 희생으로 살아남는다. 조씨고아는 스무 살이 돼서야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도안고 집안에 복수한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4대 비극 중 하나인 '조씨고아(원작 기군상)'를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 연출해 2015년 초연했다. 초연 이후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9년 국립극단 설문조사에서 '국립극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의 사랑도 받았다.
조순은 덕망이 높은 인물. 여러 사람이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정영을 돕고,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는다. 하장권 한궐은 "출세와 영달이 제 아무리 좋다한들 그따위 눈 먼 공을 세워 떵떵거리는 게 무슨 놈의 장부의 길이겠나. 오로지 의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왔구나. 덧없이 스러져도 후회 없이 죽으리. 이 세상을 탄식하며 미련 없이 웃노라"라며 자결한다.
조순과 함께 벼슬을 했던 공손저구도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라.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 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새 늙었구나.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는다면,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말년의 도리가 더는 아닐 터"라며 조씨고아를 살리고 자신을 희생한다.
한궐과 공선저구가 지키려는 의리는 극의 잔혹함을 누그러뜨리고 낭만적 매력을 더한다. 자칫 쉽게 목숨까지 내놓는 이들의 태도 때문에 묻힐뻔한 비극성은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친아들을 희생하는 정영의 이야기에서 극대화된다. 1막은 아들을 잃은 정영의 눈물로 마무리된다. 극도의 애통함을 절제된 대사로 억눌러 표현하는 정영의 연기는 압권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또 하나의 매력은 연극의 원형적 감각을 살려낸 무대다. 무대는 거대한 붉은색 막만 드리워 있을 뿐 텅 비었다. 때로 텅 빈 무대는 지나친 축약으로 관객에게 친절하지 못한 인상을 주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선웅 연출은 극도로 절제된 소도구만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특히 죽음을 맞은 이들을 거두어가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검은 옷을 입은 묵자가 등장해 죽은 인물 앞에서 검은 부채를 펼친 뒤 죽은 인물과 함께 무대를 떠난다. 고선웅 연출은 부채를 일종의 커튼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하나의 작은 막이 끝났음을 부채로 알리는 셈이다.
말이 없던 묵자는 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마지막 대사로 전하며 존재감을 보인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고선웅 연출은 23일 공연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복수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후련해지지는 않는다라는 주제를 전달하려 했다. 복수를 꼭 해야 한다면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세상이 평화로워지려면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없는 세상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말이 안 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일이 없고 용서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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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오는 30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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