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 미납으로 감옥간 사람 5만명 넘어
벌금 대출 장발장은행 출범 10주년 맞아
"일수벌금제 재추진…빨리 문닫고 싶다"
지적장애를 가진 A씨는 2000원짜리 소품 하나를 훔쳤다가 5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벌금 낼 돈이 없었다. 30대 남성 B씨는 돈이 없어 두 달 동안 고기 한 점 못 먹었다. 두달 새 17㎏이 빠졌다. 이러다 죽겠다 싶기도 했고,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마트에서 햄 통조림을 훔쳤다. 절도죄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싱글 맘 C씨는 굶주린 아이와 함께 음식을 시켜 먹고 돈을 못 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보육원에 맡겨둔 채로 감옥에 갇혔다. 이들은 한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고 대출 받은 돈으로 벌금을 내고 사회로 돌아갔다. 우리 주변에는 몇 십, 몇 백 만원의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로 향하는 이들이 많다. 인권연대에 따르면 벌금 미납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환형유치 인원)은 2021년 2만1868명, 2022년 2만5975명, 2023년 5만7267명까지 급증했다. 2024년 통계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6만 명이 훌쩍 넘을 것으로 인권연대는 예상한다.
인권연대 주도로 2015년 2월 25일 출범한 곳이 ‘장발장은행’이다. 돈이 없어 감옥에 가는 현대판 장발장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설립됐다. 은행의 모토는 ‘무담보’, ‘무이자’, ‘인간 신용은행’이다. 지원금액은 최대 300만원으로 이자는 없다. 최장 3개월 거치, 1년 동안 나눠 갚으면 된다. 지난 10년간 1452명의 시민에게 25억 원 이상을 대출해줬다. 지난달에도 1980년생부터 2004년생까지 8명의 장발장에게 1786만원을 대출해줬다. 이곳은 정부나 기업 지원을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 1만7547명의 개인, 단체, 교회 등에서 18억원을 후원했다. 초대 은행장은 홍세화 선생(지난해 작고)이다. 홍 선생은 벌금제 자체를 개혁하는 방안과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벌금도 재산과 소득에 비례해 내도록 하는 일수벌금제를 핵심적으로 추진했다. 벌금제 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보였다. 2022년부터 미납한 벌금을 사회봉사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이 확대됐다. 중위소득 50% 이내 저소득층만 가능했는데, 70%까지로 넓힌 것이다. 빈곤 취약 계층은 벌금을 연기하거나 나눠낼 수 있다.
남은 퍼즐은 일수벌금제다. 우리나라는 법정형 범위 안에서 벌금 총액을 정하는 총액벌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일수벌금제는 벌금형의 내용을 형사책임에 비례하는 ‘일정한 기간’과 피고인의 구체적인 경제적 능력에 따른 ‘일수 정액’으로 정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시행 중인 소득과 재산에 따라 벌금을 달리 매기는 것으로 차등벌금제다. 문재인 전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국회서도 관련 법 개정안이 꾸준히 발의됐지만 동일한 범죄에 다른 형벌을 내리는 형평성 문제, 재산 또는 소득 산정의 어려움, 판사의 자의적 해석 가능성 등의 반대에 막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출범 10주년을 맞아 장발장은행은 민주당 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이달 25일 정책토론회를 열어 일수벌금제 도입을 위한 공론화를 시작한다. 장발장은행은 시작부터 하루 빨리 문닫는 게 목표다. 일수벌금제가 도입되면 목표를 달성해 문을 닫겠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기간 영업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경호 이슈&트렌드팀장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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