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1979년 12·12 군사반란 9시간 조명
신군부 신속하게 정권 탈취, 정부 관료 우왕좌왕·우유부단
최규하 재가 않고 버텼다면, 노재현 장관 동조 안 했다면
군사반란 성공 못했을 것…정승화 "최대 책임자" 비판
김성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신군부 세력 전두광(황정민) 보안사령관과 그에 맞서 서울을 지키려는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의 긴박한 아홉 시간에 집중한다. 결과는 온 국민이 아는 그대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군내 강경파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했다. 민주화 앞날에 드리운 암운에 서울의 봄은 프라하의 그것처럼 오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일련의 과정을 신랄하고 긴박하고 전달한다. 신군부는 전두광이 구상한 계획에 따라 각자 임무를 신속하게 실천한다. 우왕좌왕과 우유부단으로 일관하는 반대편 핵심 인사들과 대조적이다. 이태신을 위시한 저지 세력은 이중고를 겪으며 고군분투한다. 김성수 감독은 비록 패했으나 그들의 헌신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까지 맞섰던 군인들이 있었기에 훗날 반란죄가 성립될 수 있었다. 12·12 군사반란이 이들의 역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10·26 사태가 발생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쿠데타가 성공한 요인은 하나회로 다져진 끈끈한 인맥이었다. 전 장교의 0.05%에 불과했으나 주요 기관 곳곳을 순식간에 점령하다시피 했다. 김 감독은 강력한 결속을 지탱한 조폭형 의리와 탐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뿌리까지 다루려면 10부작 드라마로 그려도 부족할 듯싶다"고 말했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사조직이었다. 인선 작업부터 비밀리에 진행했다. 누가 자기와 같은 회원인지 모를 정도였다. 상당수는 서울 주변을 맴돌며 요직과 승진을 독차지했다. 중심에는 절대 후원자인 육사 8기 윤필용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주요 보직, 장성 인사 등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렇게 군내 위계질서는 파괴됐고, 장교들의 불만은 커갔다.
암적 요소는 일찍이 제거될 수 있었다. 1973년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받았다. 하나회의 정체가 세간에 처음 드러난 순간이었다. 당시 정보처에서 확인한 조직원은 약 여든 명. 1차 수사대상자 스무 명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회 대부 격인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호로 구속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이태신의 모티브인 장태완은 저서 '12·12 쿠데타와 나'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은 실정법을 위반했다. 군 내부 사조직이란 언젠가 쿠데타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군사와 정치사를 보면 그런 일은 허다했다. 이때 과감하게 단죄했더라면 12·12 군사반란이라고 하는 쿠데타의 불씨를 꺼버릴 수 있었다."
비호는 이전에도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63년 공화당의 사전조직 핵심을 제거하는 모종의 쿠데타를 계획했다. 정승화 방첩부 대장으로부터 내용을 전달받은 박 대통령은 김재춘 중앙정보부장과 논의한 끝에 형사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육사 11기를 자신의 권력 체스 게임의 말 하나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9년 중앙정보부에서 하나회를 탐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형욱 정보부장이 수사하겠다고 보고하자 군 내부 문제라며 김재규 방첩부 대장에게 형식적 수사를 지시했다. 하나회가 여러 차례 위기에 직면하고도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조직된 힘의 원천이 간소화됐다고 '서울의 봄'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사라질 수는 없다. 선한 세력의 부작위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한국 정치를 좌우할 요소로 크게 다섯 가지를 꼽았다. 군부, 신민당 등 정치적 반대파, 대학생과 지식인, 임시 대통령, 미국의 영향이다. 신민당과 대학생은 투쟁했으나 무력했다.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이 가두(街頭) 점거 정도였다. 신민당도 국회에서 차지한 의석이 231석 가운데 예순한 석에 불과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은 부작위로 쿠데타를 도왔다.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는 저서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지금까지 역사 서술은 최규하 대통령을 우유부단한 피해자로 묘사해왔다. 내가 읽은 자료 속의 최규하는 전두환의 적극적 협조자였다. 형법 18조는 '부작위범'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해 위험 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 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한 결과에 의해 처벌한다.' 최규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부작위범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책임도 못지않게 크다.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이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무시했다. 전두환을 한직으로 인사 발령내자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건의에도 반대했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서울의 봄'에 그려졌듯 피신과 배회를 반복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다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동조하지 않았다면, 전두환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을 사살하거나 체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훗날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12·12 군사반란의 최대 책임자라고 비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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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연행의 불법성을 다른 군 장성들에게 알리고 하루 이틀 더 버티었다면 합수본부 측은 제압당했을 겁니다. 5·16 군사정변 때는 군 전체가 박정희 소장을 지지하고 있었는데도 윤보선 대통령이나 장면 총리가 진압을 명령했었더라면 토벌당했을 분위기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 주동 세력은 군의 지지를 5·16 군사정변 때처럼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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