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보상금 받은 과거사 사건 피해자도 국가에 위자료 청구 가능"
"위헌 조항을 근거로 한 '각하' 판결 기판력 없어"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 일부위헌 결정 이후
추가 사실자료 제출 없이 위자료 청구 가능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아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긴 피해자라도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화해 성립 간주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에는 다시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헌재 위헌 결정 이전에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재판상 화해 성립 간주 조항을 근거로 내려진 '각하' 판결의 기판력이 위헌 결정 이후까지 미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기판력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이후 다른 법원에서 그 사건이 다시 제소되더라도 이전 재판 내용과 모순된 판단을 할수 없도록 구속하는 소송법상 효력을 의미한다.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오석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가혹행위를 당하고 복역한 뒤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은 A씨와 B씨가 국가를 상대로 각각 6억원, 8억원의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상고심에서 소를 각하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기존에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이 사건 위헌 결정이 선고된 이후에는 피고(대한민국) 소속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원고들과 피고 사이에 재판상 화해가 성립했다고 볼 근거가 없게 됐다"며 "그렇다면 원고들이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을 구하는 이 사건에서는 선행소송 각하 판결에서 확인된 '권리보호의 이익 결여'라는 소송요건의 흠결이 보완됐다 할 것이므로 원고들이 추가로 그러한 소송요건의 흠결 보완을 위한 사실자료를 제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사건 소가 여전히 선행소송 각하 판결에 따른 기판력의 제한을 받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도 원심은 소송판결(소송요건 흠결을 이유로 한 각하 종국판결)인 선행소송 각하 판결의 기판력만을 이유로 원고들의 권리보호의 이익을 부정해 이 사건 소가 부적법하다고 판단했다"라며 "이러한 원심 판결에는 위헌 결정의 효력과 소송판결의 기판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A씨와 B씨는 1981년경 반국가단체인 전국민주노동자연맹에 가담했다는 등 이유로 영장 없이 연행돼 구금 상태에서 폭행을 당하는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한 뒤 1983년 출소했다. 그리고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 지급 결정에 동의한 뒤 각 3300만원, 5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2009년 재심을 청구해 2012년 각각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이후 두 사람은 2013년 국가를 상대로 가혹행위 등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소를 각하했다. 이미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음으로써 국가와의 사이에 재판상 화해가 성립한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어 부적법한 소라는 이유였다.
당시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은 '이 법에 의한 보상금 등의 지급 결정은 신청인이 동의한 때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에 대하여 민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한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는 화해성립 간주 조항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2018년 8월 헌재가 이 조항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중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은 이 같은 헌재 위헌 결정을 바탕으로 2019년 1월 다시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권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피고 국가 측은 헌재의 위헌 결정이 법률에 대한 단순 위헌 결정이 아니라 법률 조항의 특정한 내용에 대한 해석·적용만 위헌 선언한 '한정위헌' 결정이기 때문에 법원을 기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헌재의 위헌 결정은 민주화보상법상 화해간주조항의 '피해'를 적극적·소극적 손해 부분과 정신적 손해 부분으로 분리해 이 중 정신적 손해 부분에 대해 위헌 결정한 일부위헌결정이기 때문에 법원을 기속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고 판단, 청구를 기각하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는 '법률적 장애'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헌재에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한 피해자들도 헌법재판소법과 민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사유를 안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재심의 소를 제기해야 하는 제한이 있고 ▲헌재 위헌 결정의 효력은 기본적으로 '장래효'인 점과 ▲앞서 각하 판결을 받은 이후 시효를 중단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헌재 위헌 결정 때까지 소멸시효가 중단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2심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손해배상청구를 인정할지에 대한 본안 판단을 하기 이전에 앞서 두 사람이 받은 각하 판결의 기판력 때문에 '권리보호의 이익'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두 사람은 앞선 재판에서 소송요건 흠결을 이유로 각하 판결을 받았는데, 이후 소송요건의 흠결을 보완하기 위한 사실자료가 보완된 사정이 전혀 없고, 화해간주조항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앞선 확정판결의 효력을 다툴 수는 없다고 본 것.
재판부는 "이 사건 위헌 결정의 효력은 위헌 결정 이후에 같은 이유로 제소된 일반사건인 이 사건에도 미친다고는 할 것이나, 다른 법리인 기판력에 의해 결과적으로 그 소급효가 제한되는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경우 간접적으로나마 위헌 결정의 소급효를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법치주의의 원칙상 요청되는 바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판단은 틀렸다고 봤다.
재판부는 2심 재판부와 달리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화해성립이 간주되는 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에 '권리보호의 이익 결여'라는 소송요건의 흠결은 저절로 보완된 것으로 봐야 하며, 추가로 그 같은 흠결을 보완하기 위한 사실자료를 제출할 필요도 없다고 봤다.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재판부는 A씨와 B씨가 헌재 위헌 결정이 나오기 전에 받은 '각하' 판결의 기판력이 헌재 위헌 결정 이후에도 미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른바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청구' 사건에서 헌재 위헌 결정 전에 화해간주 효과가 발생했음을 이유로 각하 판결을 받은 경우, 그 각하 판결의 기판력에 따라 다시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지에 관해 그동안 하급심이 통일돼 있지 않았다"라며 "이번 판결은 과거사 사건 피해자가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해 선행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받아 확정됐더라도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화해 성립 근거가 사라져 각하 판결의 기판력 제한을 받지 않고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 확인해 준 판결"이라고 밝혔다.
한편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박정화)는 1976년 육군 하사로 근무하던 중 긴급조치 제9호를 위반한 혐의(유언비어유포)로 중앙정보부 부산분실로 끌려가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366일간 복역한 C씨가 낸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위 판결과 같은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권리보호의 이익과 관련해 "이 사건 위헌 결정은 법원에 대한 기속력이 있고,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등을 받더라도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볼 근거가 사라졌다"라며 "이 사건 소가 여전히 선행소송 각하 판결에 따른 기판력의 제한을 받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소멸시효 완성 여부와 관련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가 피고를 상대로 긴급조치 제9호에 기한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인한 불법행위로 발생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어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한 위헌·무효 판단 이후에도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청구를 원칙적으로 제한했던 대법원 판례가 존재했다는 점과 ▲원고에 대한 재심 절차를 거쳐 무죄 판결이 확정됐지만,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보상금 등 지급 결정 동의에 재판상 화해의 효력을 인정하던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이 존재했고, 이에 따라 선행소송에서 각하 판결이 확정된 점 ▲헌재의 위헌 결정이 선고됨으로써 선행소송의 각하 판결에 확정된 소송요건의 흠결이 보완된 점 등을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삼성 주춤하자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1년 만에 흑...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긴급조치 제9호에 기한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인한 불법행위로 발생한 권리에 대한 소멸시효와 관련, 사안에 따라 일련의 법률적·제도적 변화가 완결되기까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재확인해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라며 "나아가 이번 판결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보상금 등 지급 결정 동의에 재판상 화해의 효력을 인정하던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과 이로 인한 선행소송 각하 판결 등을 그러한 장애사유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