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예잇수다]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몇 해 전, KBS 다큐3일에 출연한 묵호항 문어잡이 배 선장 고석길 씨가 화제가 됐다. VJ가 어릴 적 꿈을 묻자 고 선장은 “내게도 꿈은 있었다”며 “나는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며 이형기의 시 ‘낙화’를 갑판 위에서 암송했다. 시청자들은 바다 위에서 꿈을 잊지 않고 삶의 철학을 읊조리는 고 선장을 두고 인생 자체로 문학이 된 낭만 어부라며 응원과 감동의 메시지를 보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노자 또한 도덕경에서 “공을 이루고 나서는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니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功成而不居 夫惟不居 是而不去)”고 말한 것을 보면 ‘공(功)’은 놓기도, 또 잊기도 어려운 대상이며, 이를 두고 홀연히 떠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예잇수다]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
AD
원본보기 아이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의 경영권 분쟁 역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에 대한 입장차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2019년 KB자산운용이 이 전 총괄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과 SM의 관계 정리를 요구했을 때 SM과 이 전 총괄은 프로듀싱의 중요성을 내세워 이를 묵살했다. 3년 뒤인 2022년 SM 지분 1%를 확보한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같은 문제를 지적하자 이번에도 이 전 총괄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상대는 전과 달랐다. 주주총회에서 자신들이 추천한 감사를 임명하는 데 성공한 얼라인은 SM의 근본적인 지배구조개선을 요구하며 이 전 총괄의 ‘가야 할 때’를 앞당겨왔다.


두 번의 시그널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이 전 총괄은 그사이 자신의 지분 매각을 물밑 추진했다. 매각 협상을 진행한 CJ ENM과 카카오엔터의 인수제안서가 날아왔지만, 그는 또 한 번 망설였다. 장고가 이어지자 일각에서는 이 전 총괄이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했을 뿐 실제 매각 의지는 없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때 카카오엔터는 매각 협상에서 이 전 총괄에게 지분 매입 후에도 향후 5년간 카카오엔터의 음악사업 총괄권한과 지분투자기회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이 전 총괄이 5년 그 이상의 활동을 계획하고 있어 카카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예잇수다]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 원본보기 아이콘

예상은 적중했다. SM과 라이크기획의 계약에 따르면 이 전 총괄은 SM으로부터 2092년까지 기존 발매된 음반, 음원 수익에 대해 로열티 6%, 2025년 말까지 매니지먼트 수익에 대한 로열티 3%를 수취할 예정이었다. 70년간의 로열티 수취 문제가 대두되자 SM 사내 변호사인 조병규 부사장은 “(이 전 총괄이 로열티를) 이미 오래전부터 포기할 수도 있고, 사회에 환원할 수도 있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며 “먼저 밝힐지, 나중에 대응할지, 어떠한 방법으로 밝힐지를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실행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정은 무용한 호소에 그쳤다.

결국 이수만을 배제한 SM 3.0 비전이 발표되고, 카카오가 신주 및 전환사채 인수로 SM 2대 주주에 오르자 이 전 총괄은 그제야 떠날 채비에 나섰다. 쫓겨날 상황에 부닥치고 나서야 스스로 지분을 하이브에 넘기고 SM을 떠나는 그의 행보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대중에게 적나라하게 시사했다.


낭만 어부 고석길 선장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낙화’에 이어 조지훈의 ‘사모’를 암송했다.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독재자가 된 K팝 영웅의 쓸쓸한 퇴장을 통해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잇수다]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 원본보기 아이콘

편집자주예잇수다(藝It수다)는 예술에 대한 수다의 줄임말로 음악·미술·공연 등 예술 전반의 이슈와 트렌드를 주제로 한 칼럼입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뒷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