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슬레이트]민족주의·미스터리보다 동성연인의 삶 '유령'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마이자 원작 중국소설 '풍성' 영화화 '유령'
이해영 감독, 미스터리 요소들 과감히 배제
치열한 심리전 장점 실종…단순 배역 묘사 그쳐
이하늬 연기 변신과 비현실적 미장센은 볼만…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해영 감독의 영화 '유령'은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마이자(?家)가 쓴 '풍성(風聲)'이다. 영화화되기는 두 번째다. 중국에서 2009년 '바람의 소리'로 먼저 시각화했다. 배경은 국민당 부주석 왕징웨이(汪精?)가 일본과 결탁해 국민정부(國民政府)를 수립한 뒤인 1942년 난징. 일제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정부 요원들이 연이어 살해된다. 일본군 특무부 장교 다케다(황효명)는 배후에 북경 공산당 지도자 '유령'이 있음을 파악한다. 일본군 사령부에 잠입했다 판단하고 가짜 암호를 내보낸다. 접근한 용의자 다섯 명을 외딴 별장에 감금하고 회유와 고문으로 색출을 시도한다. "백초당 집회 내용은 여러분만 알고 있습니다. 사령부에 잠입해 정보를 빼낸 유령이 바로 여러분 안에 있다는 말이죠."

[슬레이트]민족주의·미스터리보다 동성연인의 삶 '유령'
AD
원본보기 아이콘

△ 원작의 장점 버린 '유령', 채워지지 않은 공백

고군서(高郡書)·진국부(陳國富) 감독은 원작의 장점인 치열한 심리전 묘사에 방점을 찍는다. 배역들이 동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미묘한 변화에 집중한다. 절정까지 유령이 누군지, 들키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게 한다. '나이브스 아웃(2019)'이나 '오리엔트 특급살인(2017)' 같이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유령'은 정반대 노선을 취한다. 추리나 분석 요소를 과감하게 배제한다. 극 초반부터 박차경(이하늬)이 유령임을 자신 있게 드러낸다. 일본 경찰인 무리야마 준지(설경구)가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도 까발린다. 이 감독은 "애초 미스터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시나리오를 썼다"라며 "관객이 ('바람의 소리' 같은 장르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유령이 누군지 밝히기보다 유령의 탈을 쓴 사람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했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모습으로 스릴과 쾌감도 전하고 싶었고."


의도대로라면 용의자들이 갇힌 벼랑 끝 외딴 호텔은 첩보와 액션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전자는 조금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알아내는 정보가 경호 대장 다카하라 가이토(박해수)가 술술 쏟아내는 가짜 암호에 불과하다. 박차경은 이를 외부의 동지들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후자는 크게 세 번 등장한다. 박차경과 무라야마의 격투를 제외하면 모두 탈출 과정에 집중돼 있다. 이 감독은 도주 전까지 긴 공백을 단순한 배역 묘사로 때운다. 예컨대 천 계장(서현우)은 시종일관 굶고 있을 반려묘를 걱정한다. 이 감독은 "의외성 강한 재미로 배역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길 바랐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배역과 유기적으로 얽혀야 기대할 수 있는 효과다. 이야기 주변을 내내 겉도는 천 계장은 해당 사항이 없다.


[슬레이트]민족주의·미스터리보다 동성연인의 삶 '유령' 원본보기 아이콘

무리야마와 다카하라는 이보다 더 사정이 열악하다. 상대적으로 비중만 클 뿐, 과장된 행동과 조악한 대화로 점철돼 있다. 전자는 과거의 쓰라린 기억에 반복적으로 매몰된다. 상기할수록 악에 받쳐서 했던 말을 다시 씹어 뱉는다. 후자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유령을 잡고 싶어 안달이 난 악당에 불과하다. 극 초반 가짜 암호를 내보낸 기민함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무능하기까지 하다. 천편일률적 대사와 분노한 몸짓으로 박차경과 수화빙탄 관계만 형성한다. 이를 몰랐을 리 없는 설경구와 박해수의 열연은 헌신이나 다름없다.

△ 연기 변신과 미학적 욕망이 가리키는 동성애

'유령'은 두 배우의 희생으로 두 가지를 얻는다. 이하늬의 연기 변신과 이 감독의 미학적 욕망 발현이다. 박차경은 주인공치고 대사가 적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는 배역이다. 끓어오르는 분심과 울분을 애써 억누른다. 호텔을 탈출하며 보이는 절실한 눈빛 정도를 제외하면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하늬는 이로써 생길 공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감독이 비현실적 미장센으로 할 말을 대신해줬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박차경에 대한 감정과 은유, 암시로 채워 넣었다.


[슬레이트]민족주의·미스터리보다 동성연인의 삶 '유령' 원본보기 아이콘

가장 눈에 띄는 장치는 영화 포스터다. 극 초반에는 극장 간판에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상하이 익스프레스(1932)'를 내걸었다. 마를렌 디트리히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가 연기한 상하이 릴리는 특급열차에서 옛 연인인 도널드 하비(클라이브 브룩) 박사와 재회한다. 해후의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게릴라 부대가 열차를 장악하고 승객들을 협박한다. 남성 승객들이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은 릴리와 직업여성 후이 페이(안나 메이 웡)의 활약으로 역전된다. '유령'에서는 박차경과 난영(이솜)이 용기와 희생을 발휘해 선입견을 뒤집는다. 안나 메이 웡과 디트리히처럼 서로를 사랑하기도 한다.


극 후반에는 우리 민족자본과 기술로 처음 만들어진 영화인 '장화홍련전(1928)' 포스터가 나온다. 제작진이 배우 금새록을 두 배역(장화·홍련)으로 분장하고 촬영해 만들었다. 이 감독은 "상실의 슬픔과 쟁취의 의지가 대칭을 이루는 구조가 중요했다"라고 설명했다. '장화홍련전'에서 슬픔은 꽃(花), 의지는 귀(鬼)다. 둘이면서 하나인 삶을 산 자매는 순종과 순응의 내면화로 피해자의 정체성을 가진다. 흉흉한 원귀가 돼서야 억압과 탄압으로 얼룩진 사회 관념을 바로잡는다. '유령'은 사랑의 힘으로 구조를 전복한다. 뒤따라 죽는 꽃은 더 이상 없다. 박차경은 난영보다 더 능동적 주체로 변모한다. 세상 밖으로 나와 총을 겨누며 여성 연대까지 가리킨다. 민족주의 정서에 기댄 그간 일제강점기 배역들과 분명한 선을 긋는다. 무모하지만 대담하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25일만에 사의…윤 대통령 재가할 듯 [포토] 12년만에 서울 버스파업 "웰컴 백 준호!"…손흥민, 태국전서 외친 말…역시 인성갑

    #국내이슈

  • "애플, 5월초 아이패드 신제품 선보인다…18개월 만" 디즈니-플로리다 ‘게이언급금지법’ 소송 일단락 '아일 비 미싱 유' 부른 미국 래퍼, 초대형 성범죄 스캔들 '발칵'

    #해외이슈

  • 올봄 최악 황사 덮쳤다…주말까지 마스크 필수 [이미지 다이어리]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푸바오, 일주일 후 中 간다…에버랜드, 배웅시간 만들어

    #포토PICK

  • 첨단사양 빼곡…벤츠 SUV 눈길 끄는 이유 기아, 생성형AI 탑재 준중형 세단 K4 세계 첫 공개 벤츠 G바겐 전기차 올해 나온다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국가 신뢰도 높이는 선진국채클럽 ‘WGBI’ [뉴스속 용어]코코아 t당 1만 달러 넘자 '초코플레이션' 비상 [뉴스속 기업]트럼프가 만든 SNS ‘트루스 소셜’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