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조의 고의' 정범의 구체적인 범죄 유형 몰라도 인정

서울 서초동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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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정범인 보이스피싱범에게 자신의 통장을 빌려준 방조범이 정범이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방조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태악)는 금융실명법위반방조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청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판단에는 금융실명법 제3조 3항에서 말하는 '탈법행위'의 의미와 방조범의 '정범의 고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A씨는 2019년 1월 22일 '마카오 MGM 한인민박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광고 문자를 받고 문의 전화를 했고, 잠시 뒤 B씨로부터 보이스톡으로 온 연락을 받았다.

B씨로부터 "마카오에 본사가 있고 한국에 체인점이 있는데, 한국에 있는 고객들을 상대로 환전해 주는 업무를 한다. 고객이 입금한 돈을 인출해 환전소 직원에게 전달해 주면 된다. 월 400-6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얘기를 들은 A씨는 B씨에게 자신의 신용협동조합 계좌의 계좌번호를 알려줬다.


그리고 일주일 뒤 B씨의 연락을 받고 이모씨가 자신의 신협 계좌로 송금한 940만원을 인출한 뒤 수수료 15만원을 뺀 나머지 925만원을 B씨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B씨는 보이스피싱범이었고, A씨의 계좌에 입금된 돈은 B씨 일당이 피해자 이씨를 속여 편취한 돈이었다.


검찰은 B씨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것을 도와준 방조 혐의로 A씨를 재판에 넘겼다.


금융실명법 제3조(금융실명거래) 3항은 불법재산은닉이나 자금세탁, 강제집행 면탈, 그 밖에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같은 법 제6조(벌칙) 1항은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먼저 "방조는 정범이 범행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종범의 행위이므로, 종범은 정범의 실행을 방조한다는 방조의 고의와 정범의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한다는 점에 대한 정범의 고의가 있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는 정범과 달리 정범의 범죄를 도와주는 종범(방조범)은 자신이 정범을 도와준다는 방조의 고의 외에도 정범의 행위가 어떤 구성요건에 해당되는 범죄라는 점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이다.


재판부는 "따라서 피고인에게 정범이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한다는 점에 관한 고의가 있는 경우에만, 피고인이 금융실명법위반방조의 죄책을 부담한다"고 밝혔다.


즉 B씨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A씨 명의 계좌를 이용해 금융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A씨가 인지했어야 방조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고객이 입금한 돈을 인출해 환전소 직원에게 전달해 주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법률에 의한 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탈법행위인지에 대해 특정된 바가 없다"며 "따라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A씨가 왜 B씨가 자신의 계좌를 이용하는지, 즉 B씨가 금융실명법 제3조 3항에 반해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자신의 실명 계좌를 이용한다는 점을 인지했다고 볼 수 없어 정범에 대한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2심 재판부 역시 이 같은 1심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먼저 "방조범에서 정범의 고의는 정범에 의해 실현되는 범죄의 구체적 내용을 인식할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고 미필적 인식 또는 예견으로 족하다"는 대법원 판결을 원용했다.


이어 "금융실명법 제6조 1항 위반죄는 이른바 초과주관적 위법요소로서 '탈법행위의 목적'을 범죄성립요건으로 하는 목적범이므로, 방조범에게도 정범이 위와 같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 실명 금융거래를 한다는 점에 관한 고의가 있어야 하나, 그 목적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인식할 것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즉 방조범에게는 자신이 정범을 돕는다는 '방조의 고의'와 정범이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는 점에 대한 인식인 '정범의 고의'가 필요하지만, 이때 방조범에게 정범의 고의가 인정되기 위해 정범이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 행위를 하는지까지 인식할 필요는 없으며, 고의 외의 주관적 구성요건요소인 '목적'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내용까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범행 당시 A씨가 인지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금융실명법위반죄 방조범이 성립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환전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은행을 이용하면 수수료가 비싸서 개인 환전소를 이용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진술했다"고 전제했다.


이어 "피고인은 정범이 '탈법행위'에 해당하는 무등록 환전영업을 하기 위해 타인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인식했음에도 이러한 범행을 돕기 위해 자신 명의의 금융계좌 정보를 제공했다"며 "그렇다면 피고인에게는 금융실명법 제6조 1항 위반죄의 방조범이 성립하고, 피고인이 정범이 목적으로 삼은 탈법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범죄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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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A씨가 비록 B씨가 보이스피싱 등 '전기통신금융사기'에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계좌를 이용한다고 인식하지는 못했더라도, '무등록 환전영업'이라는 외국환거래법 위반의 탈법행위를 할 목적으로 타인 실명 금융거래를 한단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B씨의 범행에 대한 방조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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