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며 최신 이론과 사상의 동향을 소개하는 읻다의 서평 무크지다. 3호 주제는 '전기, 삶에서 글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황제와 영웅에서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 광인과 무명인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삶을 기술해 온 전기(biography) 장르를 고찰한다. 글은 과연 한 삶의 양적 방대함과 질적 다층성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는가? 삶의 풍부함과 글의 빈약함을 숙명처럼 맞닥뜨린 전기 작가들은 이 예정된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우리는 이 실패의 기록들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수록된 열다섯 편의 서평은 이러한 질문을 마주한 채 각자의 관점에서 전기라는 글쓰기의 가능성과 한계를 묻는다.

[책 한 모금]교차 3호 : 전기, 삶에서 글로
AD
원본보기 아이콘

고유한 활동으로서 전기는 인간이 삶과 글 사이에 본질적 관계를 설정한 문화의 산물이다. 이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인간이라면 망각과 죽음으로 떨어지는 삶을 글로 가로채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단지 살기만 했다면 삶을 느끼지도,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삶은 텍스트의 구조와 문체와 의미망에 따라 인식된다. 전기는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글을 통해 비로소 살게 되는 일이다. 쉽게 쓴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함축을 지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 개인으로서 인간을 앞세우고 투명한 이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기는 고리타분한 휴머니즘의 전유물이며, 말하자면 극복되어야 할 인류세의 문학이다. 그런데 다음 인간, 다음 무엇인가의 형상은 전에 보지 못한 전기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전기의 원리는 나와 다른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규정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 존재에 붙여진 잠정적 이름일 뿐이다. 「김영욱, 〈한 인간을 쓴다는 것〉」중에서


《사기》와 《한서》는 처음부터 서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20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자 문화권의 지식인들은 사마천과 반고를 ‘반마’로 병칭하며 두 사람의 저작을 함께 논했다. [...] 유진옹(1231-1294)이 《반마이동평》(반고와 사마천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한 평론)에서 문학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 유진옹은 《사기 열전》에서 사마천이 허구의 내용을 동원해서까지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해 낸 것을 칭찬했고, 명 왕조의 지식인들도 같은 기준으로 《사기》를 문학의 모범으로 삼았다. 한편 청나라 때 고증학이 성행하면서 《한서》를 선호하는 경향이 다시 늘어났다. 조선 시대 정조(재위 1776-1800)의 경우 《사기》와 《한서》를 여러 번 읽기를 추천하면서도 모두 “《한서》는 끝내 법도에 매였기 때문에 문자 이외에는 여지가 보이지 않아 호탕하고 준결한 사마천과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고, 그에 따라 《사기》와 《한서》중에서 어느 쪽을 더 높이 평가할지도 바뀌어 왔다. 평가의 내용은 다양할 수 있지만, 모두 《사기》와 《한서》가 다른 역사서를 압도할 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주아,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질서 정연한 전통〉」중에서

AD

교차 3호 : 전기, 삶에서 글로 | 주아 외 14명 지음 | 416쪽 | 읻다 | 2만2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