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 퇴직연금 원리금 보장상품 시장의 '기울어진 운동장'
[아시아경제 황준호 기자]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 옵션)가 시행된 지 한 달 여가 지났다. 정확하게는 관련 법이 시행된 지 한 달 여가 흘렀다고 보는 것이 맞다. 퇴직연금 사업자들과 고용노동부는 현재 디폴트 옵션 상품군 내 1차 상품을 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달 말까지 협의가 끝나고 상품 신청이 이뤄지면 10월말 정도에는 본격적인 상품군 정비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상품 정비가 이뤄지면 내년 께에는 디폴트 옵션에 가입이 이뤄질 수 있다.
디폴트 옵션은 퇴직연금 중 가입자가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 가입자의 운용 지시 없이도 금융사가 가입자가 사전에 결정한 운용 방법을 통해 운용하는 제도다. 미국이나 호주 처럼 안정적 장기 투자를 통한 ‘연금 부자’를 양산하기 위해 마련된다. 그런데 정작 미국, 호주에는 없는 원리금 보장상품이 들어가면서 대부분의 자금이 원리금 보장상품에 몰릴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295조6000억원 중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들어간 적립금이 255조4000억원(86.4%, 대기성자금 포함)에 달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원리금 보장상품의 금리 시장에서 잡음이 나오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와 비사업자 간 원리금 보장상품의 금리와 관련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형성돼 있어 공정한 경쟁의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의 규정상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매월 마지막 주까지 금리를 공시한다. 통상 매월 25일에서 월말까지 금리를 공시하는데, 혹시 문제라도 발생할 경우 수정 공시, 인쇄물 수정 등에 대응할 시간을 두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사업자들의 금리는 월 말이면 다 공시가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비사업자의 경우 이 감독 규정을 적용 받지 않는다. 언제든 공시를 낼 수 있고 수정도 가능하다. 그래서 사업자들이 공시를 하면 이를 살펴보다 사업자들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 자사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사업자들도 금리를 수정할 수는 있긴 하나, 해당 규정이 과도한 금리 경쟁 발생과 담합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매서운 당국의 눈치를 고려해야 한다. 사실상 늦장 공시나 수정 공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기업, 개인 등 가입자 입장에서는 가능한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상품을 가입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자들은 비사업자의 상품을 수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수취하기 위해서는 비사업자에게 수수료를 내야 한다. 예를 들어 1000억원 규모 상품을 수취하면 이 금액의 0.3% 만큼 수수료로 내는 식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해 일종의 금리 돌려막기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비용은 누가 부담하게 될까. 업계 관계자는 "가입자들이 내는 운용 보수에 녹일 수밖에 없고, 이는 수수료를 더 높이지는 못하더라도 내리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가입자는 금리가 높은 상품을 수취했다고 좋아했는데, 궁극적으로 사업자가 가져가는 수수료가 올라가거나 낮추지 못하게 돼, 실질적인 혜택은 크지 않은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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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당 금리 경쟁을 막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운동장의 기울기는 맞출 필요가 있다. 업계에서는 일정한 기준선 아래 모두가 경쟁하게 된다면 금리의 평균선이 올라갈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원리금 보장상품 유치를 위한 금리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는데, 디폴트옵션이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운동장의 기울기를 맞출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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