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고승범의 '회색코뿔소'…정치논리 기대는 금융위
2006년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구속기소됐다.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았다는 혐의다. 무죄로 판명났지만 공직사회에 책임질 일은 하지 말자는 ‘변양호 신드롬’이 번졌다. 총대를 메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결정하는 관료가 사라졌다.
최근 금융당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금융위원회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만기 연장·이자상환 유예’ 조치를 연장하기로 했다. 2020년 4월 시작된 이후 4번째 연장이다.
금융위는 그간 수차례 ‘질서있는 정상화’를 약속했다. 부실을 덮어두고 키운다는 지적 때문이다. 고승범 금융위원장도 불과 한달 전인 지난달 19일 "종료 시점까지 코로나 방역 상황, 금융권 건전성 모니터링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하겠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만기연장과 상환유예 조치는 3월말 종료를 원칙으로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수장이 내세운 원칙은 정치논리에 손바닥 뒤집듯 엎어졌다. 국회는 지난 21일 여야합의로 ‘소상공인 및 방역 지원을 위한 추가경정 예산안’을 의결하면서 "유예 조치를 추가로 연장하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부대의견을 냈다. 이에 금융위는 바로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하며 "부대의견 취지와 방역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의 추가 연장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가 횡행하는 지금 금융지원책의 연장이 필수인지 따지는 게 아니다. 금융위는 자료에서 추가연장 방안의 이유로 ‘여야 합의’를 거듭 언급했다. 대선을 앞두고 표를 생각하는 정치권은 당연히 추가연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권의 목소리를 근거 삼아 기다렸다는 듯 연장조치를 발표하는 금융위의 자세가 문제다.
금융위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금융에 가장 ‘빠삭한’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다. 금융지원책의 연장이 필요해졌다면, 근거와 통계를 가지고 진즉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코로나19에도 부실과 건전성이 우려된다면, 정치권의 압박에도 강단 있게 정상화를 추진했어야 했다. 국가가 법률로 금융위에 공정성과 투명성, 독립성을 부여해준 이유도 외부 개입에 흔들리지 말라는 부탁이자 명령이다.
금융당국이 총대를 메지 못하면 금융 산업 전반이 흔들린다. 금융지원책이 연장될 때마다 은행과 전문가들이 "부실이 걱정된다"며 쏟아낸 경고를 금융위가 모를 리 없다. 고 위원장 역시 수주 전 직접 회색코뿔소(예상 가능하지만 간과하는 위험)를 언급하기도 했다. 무섭게 달려오는 회색코뿔소를 정치논리에 기대는 자세로 막아낼 수는 없다.
변양호 전 국장은 사건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후배들이 너무 조심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공직자들이 비판을 무서워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걱정에서다. 욕먹지 않는다고 훌륭한 관료가 아니다. 거친 가시밭길이라도 총대를 메고 해야 할 말을 하고 필요한 정책을 집행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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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섭 기자 tmdtjq8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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