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청룡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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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이슬 기자] "여성 배우가 출연할 만한 시나리오가 거의 없어요."


몇 년 전 만해도 인터뷰 테이블에 앉은 여성 배우들은 이같이 입을 모았다.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예쁜 로맨스 상대역 아니면 엄마밖에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흥행이 보장된 남성 배우를 중심에 둬야 투자가 보장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푸념은 '과거완료형'은 아니지만,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충무로에 언니들 시대가 온 것이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제작된 영화를 살펴보면, 사나이들의 우정을 다루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로맨스 영화에서도 여성은 주로 남성의 관음 대상이었다. 아름답고 정숙한 첫사랑이거나 맹목적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로 소비되곤 했다. 기본값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폭로가 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영화 '펄프픽션', '엠마', '셰익스피어인 러브' 등을 만든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일이 수십 년간 성추행 고발자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는 탐사 보도를 실으면서 전 세계에 여성을 일으켜 세웠다.


'미투' 폭풍은 충무로에도 영향을 줬다. 과거 영화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폭로를 이어갔다. 전 세계에서 지위를 이용해 여성을 지배해온 일부 남성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충무로 여성들은 달라졌다. 직접 제작에 팔을 걷으며 변화를 위해 힘을 보탰다. 왜곡 또는 차별적 시선으로 여성을 그린 작품은 철저히 배우들한테 외면 당했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공부하면서 제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에는 없던 움직임이다.


배우 김혜수는 '내가 죽던 날'로 박지완 감독의 입봉을 도왔고, 문소리는 '세자매' 제작을 이끌었다. 모두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았지만,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선뜻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은 숱한 노력으로 완성된 영화는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 낭보를 전했다. 제작진의 진심이 인정받은 것이다.


여성 배우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김희애는 '허스토리', '윤희에게'에서 여성 서사를 그려 호평을 얻었고, 윤여정은 '미나리'로 최초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고두심, 김선영, 김혜숙 등을 비롯한 여성 배우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2021년이었다.

사진=외유내강, 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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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모가디슈', '인질' 등을 선보인 제작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와 '빛나는 순간', '태일이' 등을 제작한 명필름 심재명 대표 등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도 빛났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많은 여성 영화인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였다.


한 영화 관계자는 "이름값 있는 여성 배우, 제작진이 제작에 힘을 실으며 국내 영화계 여성 영향력이 커진 것은 분명하다"며 "최근 몇 년 사이 변화를 이끈 여성 영화인들의 약진을 빼놓고 충무로를 논할 수 없다"고 바라봤다.


이어 "할리우드에서는 '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전 세계 영화계에 여러 실질적인 변화가 있었고, 충무로도 마찬가지"라면서도 "국내 영화계는 여전히 갈 길이 정말 멀다"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주제의식이 빛나는 유의미한 여성 영화도 많았다. 반면 일부는 '여성 영화', '여성 서사'를 내세웠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흉내내기'에 그친 영화도 적지 않았다"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남성 영화'라는 말이 없듯이 언젠가는 '여성 영화'라는 말도 사라지길 바란다"라면서도 "안타깝게도 아직 충무로에서는 '여성 영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해야 할 때"라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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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영화 시장에 여성 파워가 강해졌지만,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가 동등한 비율로 만들어진다고 보긴 어렵지 않나"라며 "모두의 목소리가 반영된 작품이 치우침 없이 골고루 제작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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