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진 중기벤처부장 겸 문화레저부장

[데스크칼럼] 회장님 펀치는 스쳐도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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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유도선(노면색깔유도선)을 설치한 이후 교통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었다. 차도 바닥에 선 몇 가닥 그었을 뿐인데 효과는 엄청났다. 이걸 서울 시내에서 처음 목격한 건 5년쯤 전이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 흰색 차선. 흑백이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던 도로에 만화 같은 하늘색 선과 분홍색 선의 등장은 신선했다.


서울시는 2016년 통행 경로가 엉망인 영등포로터리 등 3곳에 시범적으로 주행유도선을 그렸다. 한국도로공사의 분석 결과를 보고 적용한 것이다. 효과를 보자 해마다 설치 장소를 늘렸다. 차로변경 건수와 사고위험도가 각각 50%, 45% 감소했다는 분석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어떤 블로거는 ‘선 하나가 이룬 혁신’이라고 평가했다. 페인트 값 정도로 교통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인 가성비 높은 아이디어였으니 그리 불릴 만 하다. 사고만 줄어든 게 아니다. 통행이 원활해지면서 생기는 경제적 효과도 상당했다. 해외사례? 도로공사 직원? 경찰? 시청 직원? 누군가는 아이디어를 냈을 텐데 이보다 앞서 1990년대나 2000년대에 비슷한 의견을 냈던 사람이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디어는 심플하고 직관적이다. 현실화까지 천신만고, 인고의 시간을 거쳤음은 짐작이 간다.


병원에선 비슷한 걸 진즉 도입했는데 환자들이 길을 쉽게 찾아서 좋다. 같은 걸 매일 반복해서 응답하지 않아도 되니 병원 직원도 좋고, 고객들의 이동 흐름이 빨라지니 병원도 여러모로 좋다.

자수성가한 물리치료사 출신 의료재단 이사장 이윤환씨 얘기가 무릎을 친다. ‘육일약국 갑시다’라는 책은 2007년에 나왔다. 그는 책을 100페이지쯤 읽다가 이 내용에 꽂혔다. ‘손님들이 서서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약국에 상담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했다’- 이 이사장은 이 구절을 읽자마자 의자 30개를 주문해 자신이 운영하는 요양병원 원무과와 간호과 앞에 설치했다.


‘가로등이 없던 골목길이 위험하지 않도록 약국 불을 밤새 켜 놨다’- 200페이지쯤 읽었을 땐 이 대목이 눈에 걸렸다. 전기업자를 불러 "제주도 롯데호텔 같은 조명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당장 1억5000만원을 들여 조명공사를 했다. 그의 요양병원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안동터미널로 들어서기 전 국도 변에 있었다. 외지에서 일을 보고 귀가하던 주민들에게 요양병원은 집(안동)에 도착했다는 걸 알리는 이정표가 됐다. 병원 불빛은 곧 그 지역 랜드마크가 됐다.


"책 수백 권 읽는 거 중요하지 않다. 눈으로 읽은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실행해야 살아있는 지식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복권은 사지 않고 하느님께 백날 빌어봐야 무슨 소용. 그의 실행력은 요즘 배달서비스보다 빨랐다.

뒤집어 생각해보자. 원무과장이 책 읽다 말고 와서 의자 30개 사자고, 총무과장이 수억원 들여서 관광지 호텔 야경처럼 병원 외벽을 밝히자면 당신은(당신이 이사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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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가 쏟아지는 주간이다. 수십 년 변치 않는 레퍼토리가 변화, 혁신이다. ‘○○님부터 변했으면…’. 매해 신년사 대필하는 비서실·홍보실 직원들은 생각한다. 변화 의지와 아이디어가 권한을 만날 때 혁신적인 사건이 생긴다. 회장님 펀치는 스쳐도 기절이다.


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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