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남자답게' '여자답게'…성역할 고정관념 얽매인 정부 홍보물
"현역 갔다 와야 남자" 병무청 홍보 영상 논란
시민들 "군 스펙 들먹여 남자다움 강요" 비난 빗발
전문가 "'여성답게, 남성답게' 강요된 성 역할 구시대적"
지난 5일 병무청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입대 홍보 영상'. "군대 다녀와야 당당한 남자" 등 내용이 담겨 '현역과 공익 갈라치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병무청 유튜브 캡처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최근 병무청이 공개한 '입대 홍보 영상'에 "군대 다녀와야 당당한 남자" "어차피 군대 가야 하는 거면 현역으로 제대로 가야" 등 갈등을 조장하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다. 사회복무요원(보충역)에 대한 비하 또는 '꼭 현역을 다녀와야 남자답다'는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는 정부 홍보물이 남성은 이래야 하고, 여성은 저래야 한다는 식의 구시대적 '성역할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다고 지적했다.
병무청은 지난 5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친구에게 듣는 군 생활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에는 휴가를 나온 현역병과 입대를 앞둔 친구 2명이 군 생활과 입영 제도 등에 관해 대화하는 모습이 담겼다.
문제가 된 내용은 현역병이 원래 병역판정 검사에서 과체중으로 4급(보충역) 판정을 받았지만, 병무청의 '슈퍼힘찬이 제도'를 통해 체중 감량 후 현역으로 입대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다. 슈퍼힘찬이 제도는 시력이나 체중 등으로 4, 5급 판정을 받은 사람이 현역 입대를 희망할 경우 병원·피트니스클럽 등의 도움을 받도록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다.
현역병이 "현역으로 갔다 와야 내 성격이 허락할 것 같아 슈퍼힘찬이 제도를 신청했다"라고 말하자, 한 친구는 "하긴 네 성격에 군대라도 다녀와야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얘기하지"라고 답한다. 현역병은 또 "어차피 우리 다 군대 가야 하잖아. 그런 거라면 (현역으로) 제대로 가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인 거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해당 영상 댓글에는 '현역과 공익 갈라치기'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현역을 나온 사람만이 남성답다'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누리꾼들은 "현역을 다녀오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냐" "21세기에 아직도 '남자는~' 이런 구시대적인 말을 정부 홍보물에서 보다니 믿기지 않는다" "이젠 군 스펙까지 들먹여 남자다움을 강요하냐" 등 강하게 반발했다.
법무부의 근로기준법 관련 홍보물. 남성들은 회의를 하고, 여성은 옆에서 복사 업무를 하는 모습으로 묘사해 여성을 부수적인 존재로 그렸다는 지적을 받았다./사진=국가인권위원회 남성들은 회의를 하는 모습, 업무를 하는 여성의 모습
원본보기 아이콘정부 공공 홍보물에 차별·편견적 메시지가 담겨 논란이 일었던 적은 이전에도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 3~5월 18개 정부 부처 홍보물 속 혐오표현 실태를 모니터링한 결과, 성차별 표현 사례로 총 760건이 지적됐다. 유형별로는 성별 대표성 불균형(34.5%), 성 역할 고정관념 및 편견(27.7%),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편견(19.6%) 등 순으로 나타났다.
부적절한 표현의 사례로, 법무부는 근로기준법 관련 홍보물에 남성들은 회의를 하고, 여성은 그 옆에서 복사 업무를 하는 모습으로 묘사해 여성을 부수적·주변적 존재로 그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환경부의 경우 명절맞이 홍보물에 여성은 음식을 준비하고 장을 보는 역할로, 남성은 운전과 성묘 등을 수행하는 역할로 표현해 가족 내 역할을 성별에 따라 고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정부 홍보물에서 여성의 모습은 치마, 하이힐, 속눈썹, 화장, 붉은색 계열 의상(남성의 경우 푸른색 계열) 등으로 묘사되는 점도 성에 관한 틀에 박힌 이미지를 강화한다고 인권위는 지적했다. 대체로 남성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여성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성역할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된 병무청 영상 역시 '현역을 나오지 않으면 당당하게 남자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등 '남성다움'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인권위는 정부 홍보물이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담은 표현이나 이미지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으며, 차별·비하 표현이 구시대적 표현과 맞물려 혐오 표현으로 나타났다"라며 "공무원의 인권 감수성 증진을 위한 교육 등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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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공공 홍보물은 시민들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만큼, 표현과 묘사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 소장은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도 '여성다움'을 강요하지만, 남성에게도 '남자다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요한다"라며 "징병제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시민 신체의 자유권을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병무청 홍보물은 이에 대한 적절한 처우 개선이 아닌, 남자라면 응당 겪어야 할 일로, 남성은 병역 의무를 통해 가족과 나라를 지키고 당연히 희생해야 할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킨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음에도, 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프레임"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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