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법썰]20년전 성폭행, 징역 살아도 '손해배상' 안한다는 범죄자
"10년 넘어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 주장… 대법 "범행 있던 날보다 장애 진단 시점이 중요"
[아시아경제 배경환 기자] 20년이 지난 성폭행 사건. 범죄자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지만 피해자가 손해배상까지 받아내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통상 불법행위 피해자는 법적으로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 이내, 불법행위가 있었던 날부터 10년으로 소송 제기 시점을 제한받고 있어서다. 시간상으로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된 듯 보였다. 이 사건의 범죄자도 "마지막 범행일로부터 10년이 넘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은 다양한 연령과 형태의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구제 권리가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법원은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산정 기준을 '범행이 있었던 날'이 아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장애 진단을 받은 날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전 테니스 선수인 A씨. A씨는 이번 판결로 20년 전에 당했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난 2001~2002년 초등학생이던 A씨는 테니스 코치 B씨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A씨는 성년이 된 2012년, 미성년자 성폭행의 공소시효가 폐지되면서 B씨를 고소하려 나섰지만 증거 수집 등의 이유로 한계에 부딪혔다.
실제 A씨는 '도가니 사건'의 사회적 여파로 2010년부터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공소시효가 해당 성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 청소년이 성년에 달한 날부터 진행되고, 2012년부터 만 13세 미만 대상 강간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폐지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고소를 결심했다.
이에 A씨는 2012년부터 다수의 성폭력 상담기관과 변호사를 찾아다녔지만 오래된 일이라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공소시효가 도과했다고 하거나 증거수집 어려움 등으로 고소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문제는 B씨를 다시 만나면서 시작됐다. 2016년 5월 한 테니스 대회장에서 우연히 B씨와 마주친 뒤 A씨는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단기 기억상실과 수면장애 등에 시달리게 됐다. 그해 6월 병원에서 PTSD 진단을 받은 A씨는 B씨를 형사 고소했고 B씨는 이듬해 10월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더 큰 문제는 손해배상에 있었다. 민법 제766조 제1항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 역시 A씨가 소송을 제기하기 16년 전에 입은 피해에 대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B씨는 소송에 대응하지 않아 1심에서 자동 패소했지만 2심부터는 "마지막 범행 시점인 2002년 8월을 기준으로 김씨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틈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소멸시효 기산점인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구체적으로 손해가 발생한 때"라며 시점의 해석을 넓혔다. 성폭행 시점이 아닌 A씨가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은 2016년으로 판단한 셈이다.
대법원도 다르지 않았다. A씨가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현됐다는 진단을 받은 때부터 B씨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발생이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봤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성범죄 피해 보상에 대한 범위가 확대돼 구제 사례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도 의미 부여에 힘을 줬다. 가해행위와 이로 인한 손해의 발생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경우,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점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은 객관적·구체적으로 손해가 발생한 때, 즉 손해의 발생이 현실적인 것으로 됐다고 할 수 있을 때를 의미한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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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범죄 당시나 일부 증상의 발생일을 일률적으로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으로 보게 되면, 피해자는 당시에는 장래의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고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돼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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