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그들은 왜 '정착'을 거부하나, '집'없는 이를 위한 영화 '노매드랜드'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편집자주당신은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으신지요. 이는 영화가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영상 속 한 장면을 꺼내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전해드립니다. 장면·묘사 과정에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평생을 일했는데 집 한 채도 못 사는 세상…….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노매드랜드'는 밴을 집으로 삼아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하는 노매드(nomad)에 관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미국에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많은 이들이 거리에 내몰려 노매드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언론인인 제시카 브루더가 실제 노매드를 만나며 취재한 동명의 논픽션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공업 마을이었던 서부 네바다주 엠파이어를 지탱하던 'US 석고' 공장이 2011년 폐쇄됐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경제침체 여파로 주민들은 일자리를 잃게 돼 뿔뿔이 흩어졌고, 엠파이어는 머지않아 우편번호마저 사라진 '유령 도시'가 됩니다.


주인공 펀은 US석고에서 일하던 남편과 이곳에 살고 있었지만, 집과 일자리를 잃은 데다 남편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 순식간에 홀로 남습니다. 펀은 그렇게 자신의 작은 밴을 타고 목적지 없는 길을 나서게 되죠.


펀은 그 뒤로 자신의 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단기직 일을 전전합니다. 아마존 물류센터 야간 작업자, 관광명소의 식당, 국립공원 내 캠프장 관리원 등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 유랑하는 삶을 삽니다. 집 없는 노매드로 산다고 해서 노동마저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밴 안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용변을 보는 일, 빨래를 하는 일 등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선 큰 수고를 들여야 하고, 두 다리를 뻗고 잘 공간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노매드의 삶은 불편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데다 애처로워 보기까지 합니다. 펀의 주변인들도 그녀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함께 살자고 여러 차례 제안합니다.


그러나 펀은 이들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홈리스(homeless·노숙인)가 아닌 하우스리스(houseless, 집이 없는)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노매드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집이 없는 삶을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의지이며, 결코 동정받을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원본보기 아이콘


이들이 노매드로 살면서 단지 생존에만 전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쉬는 날은 관광 명소를 찾아가 여가를 즐기고, 사람들을 만나 음식과 술을 먹고, 생활 방식을 공유하면서 공동체를 이루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열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죠. 단지 밴에서 생활한다는 것, 정해진 직장이 없다는 것만 다릅니다.


왜 이들이 불편투성이 생활을 택하면서까지 집에서 떠나야만 했을까. 영화는 펀과 노매드의 삶을 통해서 전통적인 집과 주거 방식에 관한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선택 배경엔 평생을 노동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집이라는 희망을 불가능한 꿈으로 바꿔버린 세상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오르는 집값, 턱없이 부족한 임금.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습니다. 벌어들이는 돈은 집세나 주택 융자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고,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여유조차 없게 되었죠.


이는 '집'이라는 것이 가장 예민한 이슈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보상받고, 부자는 아니더라도 나 자신과 가족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으나 시스템은 그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은 노동의 대가를 비웃게 했고, 평생을 성실히 일해온 사람들을 자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매드 린다 메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8년은 정말 힘들었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지. 나이는 62세가 가까워져 오는데, 정부 보조금은 550달러라고 하더군. 난 평생을 일했어. 난 12살 때부터 일하면서 혼자 두 딸을 키웠어. 이게 말이 되니?" 노매드들은 그래서 길에서의 새로운 삶을 택한 것입니다. 이 세계의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주체적인 삶을 지키기 위해서.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원본보기 아이콘


그러나 영화는 이런 사회에 대해서 울분을 터트리거나 분노를 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들처럼 살지 않고 평범한 삶을 택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그저 노매드들이 길 위의 삶을 택한 각자의 이유에 담담하게 귀 기울이는 방식을 택합니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인 펀과 데이브를 제외하곤 모두 실제 유랑 생활을 하는 노매드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 없이도, 이들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노매드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고집스럽고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각자도생해야 하는 냉정한 현실에서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나눴을 때의 풍족함이 무엇이고, 그것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자신의 밴을 타고 어딘가로, 다시 길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며 떠날 것입니다.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