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정 한은법은 '깊은 뿌리'요 '깊은 샘물'이다
지난 6월 창립 70주년을 맞은 한국은행이 연말인 요즘 변화의 기로에 섰다. 한은의 정책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될 한국은행법·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 심의 중이기 때문이다. 한은법 개정안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고용안정을 한은 설립목적에 추가하자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 후보로 추천된 사람에게 국회 인사청문 절차를 부과하자는 부류다. 한편, 전금법 개정안에는 정부(금융위원회)가 디지털 지급거래청산업을 감독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경제학자로서 나의 답은 명료하다. 발의된 방향으로 두 법률이 개정된다면, 한은의 정책독립성 및 신뢰에는 깊은 흠집이 날 것이고 그로 인해 국민경제는 두고두고 커다란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럼에도 입법 과잉의 대세 속에 삼각파도로 밀어닥친 이번 한은법·전금법 개정안은 어쩐지 심상치 않다. 혼미한 시기마다 "역사는 늘 최고의 규율(supreme discipline)"이다. 이런 점에서, 70년 전의 제정 한국은행법을 떠올려본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앙은행이다. 블룸필드 미션(미국 연방준비제도 직원이던 블룸필드와 젠센)이 1949년 가을 반년간 방한해 그 근거법인 제정 한은법을 기초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미·소간 냉전의 맥락에서 1948년 4월 트루먼 행정부가 내린 주한미군 철수 및 대한(對韓) 부흥원조 결정이 블룸필드 미션의 방한 및 제정 한은법안 작성(기술지원)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음은 올해 6월에야 뒤늦게 밝혀졌다. 사실 동 미션의 기술지원은 부흥원조당국이던 주한 경제협력처(ECA)사절단이 펼친 인플레이션안정화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 악순환이 매우 위중한 상황이었음을 반영한다.
1940년대 후반의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은 당시 재무부가 은행시스템을 장악한 가운데 정부부문에 대한 대출이 극도로 방만하게 이루어진 탓이었다. 이를 간파한 블룸필드 미션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차단하고 한은의 정책독립성을 확보하는 데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금통위를 설계했다. 동 미션은 "국가경제의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이익을 대표하는" 다수 위원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의결기구(금통위)에게로 광범위한 정책 권한 및 책임을 집중시켰다. 이로써 금통위를 정점으로 하는 한은 정책지배구조가 완성되었고, 금통위를 관류하는 '금융 민주화'와 '금융의 정치적 중립성'은 한은법의 양대 입법정신으로 확립됐다.
한은법·전금법 개정안을 다시 살펴보자. 정치적으로 민감한 고용안정이 목표로 부과되는 순간부터 한은은 시도 때도 없이 정치적 도마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또한 동 목표는 현행 물가안정·금융안정 목표와 늘 좌충우돌할 것이다. 돈 푸는 것 말고는 한은이 고용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고용안정 목표는 한은 정책지배구조의 붕괴를 부를 것이다. 한편, 근본 잣대가 돼야 할 전문성·무결성과는 거리가 먼 현행 금통위원 추천제에 국회 인사청문 절차까지 추가된다면 금통위의 정치화(政治化)만 심화될 것이다. 끝으로 중앙은행의 지급결제제도 감시자 역할은 궁극적으로 그 무제한적 발권력에서 나온다. 지급에서 결제에 이르는 일관적 흐름 일부(청산)에 난데없이 금융위가 감독자로 끼어들면, 한은의 독립적 위상 및 역할에 균열이 생겨 지급결제제도 전반의 효율성과 안정성이 둘 다 저하될 공산이 크다.
요컨대, 블룸필드 미션이 제정 한은법을 통해 구현해낸 한은(금통위)의 정책독립성·정책지배구조는 지금도 더없이 유효한 대원칙이다. 일찍이 용비어천가가 노래한 '깊은 뿌리'와 '깊은 샘물'을 어제의 제정 한은법에서 발견해내는 혜안이 절실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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