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진 법무법인 담박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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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영남권의 서원 2곳을 탐방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수도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몇몇 사람과 뜻을 모았는데 무산되니 아쉬움이 더욱 컸다. 서원은 조선 중기 지방 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일종의 사설 교육기관이다. 과거시험 합격 위주의 학문을 목표로 하지 않고, 선학을 기리고(제향) 인성을 수양하는 조선의 정신적 토대이자 근대 사립학교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서원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당쟁과 붕당의 본거지. 사화(史禍)를 비롯한 정치적 환란의 배후. 얼마나 문제가 많았으면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까? 그러나 서원의 역할과 기능이 정녕 그 정도였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대의 지식인들을 배출해내는 일이었다. 지식인들의 역할은 어느 시대나 나라를 막론하고 중요하다. 지식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단하며, 이를 행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서원이 배출한 당대의 선비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것을 중요한 의무이자 덕목으로 여겼다. 임진왜란 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의 '시무 6조'가 대표적이다.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들고 올리는 상소도 있었다고 하니 상소의 절박함과 무게감이 느껴진다.

만인소(萬人疏)는 만 명 이내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리는 집단상소인데 1881년 영남의 유생 1만여명이 올린 '영남만인소'가 유명하다. 조선 시대 언론을 담당하는 기관은 삼사(三司)라 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있었다. 이 중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兩司)라 하고 이들이 함께 상소를 올리는 것을 양사합계(兩司合啓)라 했다. 양사가 탄핵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이 합세해 간언했고, 삼사가 함께 간언을 올릴 경우 임금은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전 청와대 청원란에 '진인(塵人), 조은산'이라는 평범한 시민이 올린 '시무 7조'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간 정부를 비판하는 많은 청원이 줄을 이었지만, 이렇게 언론에 대대적으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처음인 듯싶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 형식과 문체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상소문을 접하는 것 같았고 그것이 국민의 DNA에 내재해 있는 어떤 감성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공교롭게도 조선 시대 왕의 권력을 견제하던 삼사에 해당하는 검찰과 감사원의 수장인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업무 추진에 대해 정부와 여당의 공격이 여과 없이 진행되고 있다. 두 수장의 취임 당시 엄정한 법 집행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인물이라던 찬사가 바로 엊그제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두 기관에 대한 외압이라는 여론에도 집권 세력의 공세는 멈출 줄을 모른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은 역사가 다 밝혀준다. 누군가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대에 그런 목소리, 그런 외침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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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론을박하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아예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목소리를 낸 사실을 은폐하려 하는 일들이 더 큰 문제다. 사원에 대한 붕당 정치의 폐해를 인정하더라도, 사원이 배출한 당대 지식인들이 까딱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서슬 퍼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존경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국란을 앞두고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나라의 현실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군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조선 선비들의 기개가 오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서원의 향기가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스며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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