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 트럼프의 승리는 세계의 패배였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오스트리아 태생의 세계적 석학 한스 페터 마르틴은 1996년 독일에서 '세계화의 덫(하랄트 슈만 공저)'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삶의 질이 공격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체제 대결에서 승리해 앞으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지 불과 4년 뒤다. 오늘날 후쿠야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마르틴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마르틴은 22년 만인 2018년 펴낸 책 '게임 오버'에서 자기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의 패배를 선언한다. 그는 민주주의와 삶의 질이 처참할 정도로 파괴됐다고 지적한다. 도처에서 민주주의가 셧다운되고 있으며 세계화의 덫은 지속 가능한 궤도를 이탈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합리적으로 규제되지 않은 지도 아주 오래됐다고 꼬집는다.

마르틴은 1957년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브레겐츠에서 태어났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의 최연소 편집국장을 지내고 1999년부터 무소속으로 15년간 유럽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흥미로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마르틴이 '게임 오버'를 구상했다는 점이다. 마르틴은 트럼프의 승리를 세계의 패배로 규정한 것이다. 트럼프는 마르틴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에 반하는 인물이다.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면서 분열을 조장하는 극단주의적 사고를 가졌다.

마르틴은 오늘날 세계가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워졌으며 전쟁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극단주의가 심화했다고 경고한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인물인지 많은 이가 의문을 품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극단적으로 분열된 현 세계에서 이기려면 트럼프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틴은 트럼프를 두고 미국 말고 다른 나라 인구에 대해서는 거의 괘념치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정치권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행태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극우 성향,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당들이 득세하고 유럽연합(EU)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로 좌초 위기에 놓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에 의한 불평등은 불가피하며 불평등이 오히려 동기 부여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투자회사 피셔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한 켄 피셔는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해 "창의력·기업가 정신의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재산 축적에 따른 부수적 효과"라면서 "청년들이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처럼 엄청난 부를 일군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마르틴은 이에 대해 원시적인 세계관이라고 꼬집는다. 경제적 성과는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틴은 2017년 8월 영국 옥스퍼드대의 학술 저널 '사회경제평론'을 통해 공개한 논문에서 "소득이 최상위층에 집중되는 현상이 더욱 심화하는 이유가 최상위층의 생산성 증가보다 정치적 움직임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부자가 아닌 사람이 부자를 보고 '더 노력해야지'라고 자극받을 리 없다고 지적한다.


마르틴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경제 상황이 나아져도 자신의 소득에 불만을 갖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보상이 충분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경제 상황이 좋아졌다는데 왜 불만이냐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마르틴은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할수록 부자들은 관대함이 줄고 비윤리적인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구결과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정치가 분열을 조장하고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정치에 대한 신뢰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밀레니엄세대는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마르틴은 지적한다.


극단적인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나 부채 위기 후 유럽에서 일어난 시위가 그 조짐을 보여줬다. 부자들은 이미 극단적인 상황에 대비 중이다. 벙커를 마련하는가 하면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도피처로 뉴질랜드의 땅을 매입하고 있다. 마르틴의 표현대로 '노아의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마르틴은 믿을 만한 분배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분배를 위해 고대 그리스의 열린 광장 아고라가 부활해야 한다며 부자들에게 토론의 장으로 나오라고 외친다. 다소 공허한 해법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방주에서 보여지는 부자들의 위기감이 역설적으로 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리콘밸리 벤처투자의 대부로 불리는 피터 틸이 설립한 투자업체 틸캐피털의 에릭 바인슈타인 대표이사는 진짜 부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하면 혁명의 발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부자들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나는 진짜 부자들, 즉 재산이 억 단위를 넘는 사람들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계층의 사람들, 즉 여전히 시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다. 이러한 무관심의 대가로 우리는 혁명의 발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AD

(게임 오버/한스 페터 마르틴 지음 /이지윤 옮김/한빛비즈)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