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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 후배 여성 과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최종수정 2020.06.01 11:30 기사입력 2020.06.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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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장 취임 후 다수의 공식 석상에 참석했는데, 매번 나의 소개는 '첫 여성 원장'으로 시작됐다. 원장이 여성임이 화제가 되는 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리더급 여성이 드물다는 방증일 것이다.


1970년대 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사회에서 남녀가 평등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남녀차별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통념에 반하는 의도적 행동을 통해,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나타내고자 많이 노력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희로애락을 함께 해오고 있는 귀중한 선후배들을 만났다. 사회 속에서 나의 가치와 존재를 만들어 가는 시기였다.

1985년 한국화학연구원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한국화학연구원은 기후 및 대기환경 변화에 대한 친환경 화학공정 기반 대응 기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첨단 화학소재 원천기술, 건강한 삶과 의료혁신을 위한 신약바이오 핵심 기술 등을 연구ㆍ개발하는 정부출연연구원이다. 연구원에 입사해 만난, 합리적 생각을 하는 동료들과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하는 연구원의 조직 문화는 내가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폴리이미드계 내열성 고분자 연구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폴리이미드는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중 하나다. 35년간의 연구원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발전시켜나간 동력은 인간은 항상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독립심'이었다.


이미혜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이미혜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2000년대 초 여성 과학자들에게 각종 전문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확대해 준 정부 정책 덕분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간 삶의 목표를 크게 세우지는 않았으나 업무에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 원장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됐다.

앞으로 나의 목표는 한국화학연구원을 세계 제일의 연구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후배 여성 과학자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내게도 연구와 육아를 모두 짊어져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둘을 모두 소화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이 시기를 잘 극복했기에 후배 여성 과학자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연구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진행돼야 하기에 한창 연구에 전념할 시기에 연구와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후배 여성 과학자들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연구 활동 저하가 업적 저하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탓에 과거에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연구원을 떠났다 복귀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 경력 단절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경력 단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진 덕분이다.


일과 가정의 선택의 기로에 선 여성 후배들에게 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현실의 어려움을 모르는 건 아니다. 희망적인 건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일·생활 양립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고, 사회 시스템은 급격히 개선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여성의 성장을 가로막는 성차별적 요소도 점점 해소돼가고 있다. 그러니 어렵사리 이룩한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기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독립적인 존재이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이미혜 한국화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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