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소수 더나은 비주류 세상

여성학 전공자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창립 멤버로
"여성학은 실천학문, 부당한 것을 언어화"
여성운동, 성별 관계 없이 인간이 존중 받는 사회 만드는 활동

[편집자주] 성매매 특별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 낙태죄 헌법불합치에 이어 지난달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까지. 2000년대 여성운동은 변화의 바람 속 방향을 정하는 길목의 역할을 했다. 그 바탕엔 여성 피해자들이 법 앞에서 두 번 희생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설립 29주년을 맞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환갑을 맞은 활동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변혁의 현장에 있었던 활동가 정정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원장(上), 이미경 소장(下)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이드B]환갑의 활동가下_"페미니즘 30년 역사, 이제 기록으로 남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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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꿈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당시 서울에서 법대를 다니시는 작은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판사라고 말했는데 할아버지께서 '판사 부인이나 되거라'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초등학교 때 반장, 부반장을 뽑는데 전 반장이 되고 싶었거든요? 근데 반장은 무조건 남자여야 하고 여자는 부반장을 해야 했죠. 저 아이와 내가 능력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부'자를 붙여야 하는 건지 이건 좀 아니다 생각을 많이 했었죠."

올해 환갑을 맞은 이미경 한국여성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어릴 때부터 '여자라서 안 된다'는 통념에 의문을 가졌다.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 소장은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면서 그는 그동안 가졌던 문제 의식이 이론화 되는 '신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소장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성학을 가르쳤어요. 여성학이 실천학문인데 우리 사회엔 성폭력상담소가 한 군데도 없어서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이렇게 시작을 했죠.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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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총무로 처음 상담소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한 이 소장은 어느덧 30년차 활동가가 됐다. 그는 "누구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라면서 차별을 겪게 되는데 그 차별 속에서 '이게 뭐지?' 했다가 여성학 이론을 접하면서 부당한 것을 언어화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성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운동이라고 이 소장은 말했다. 나의 변화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 더 나아가서 사회를 변화 시키는 게 그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이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성별에 관계 없이 인간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게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이 소장은 "길을 가다 보면 길을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 때 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잘못 가르쳐줬다면 그걸 지나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며 "거창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비하되면서 집중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부당한 것이고 함께 싸워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제1기 성폭력상담원 수료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지리산(왼, 사진 최상단) / 김**사건 구명대책위원회 활동 중인 지리산 (오, 중앙, 1991)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제1기 성폭력상담원 수료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지리산(왼, 사진 최상단) / 김**사건 구명대책위원회 활동 중인 지리산 (오, 중앙, 1991)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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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 간 여성운동 역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지점이 있었다. 호주제나 낙태죄 폐지, 성폭력특별법 제정 등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들을 바꿔 가는 승리의 경험이었다고 이 소장은 표현했다. 역사적 순간, 이 소장도 현장에 있었다. 2018년 미투(성폭력 고발 운동)가 체육·연예계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문제로 점점 불거지는 것을 보고 이 소장은 "미투를 받아들이는 시민의 가슴이 드디어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일종의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열었다고 봐요. 3만9000여장의 포스트잇은 시민의 공감을 이끌었고 특정 단체가 집회를 연 게 아니라 시민들이 모여서 진행했는데 운동가로서 우리의 운동 지형이 달라지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구나 싶었죠."


그는 "30년 동안 상담소에서 8만5000회가 넘는 상담을 진행했는데 그 분들은 계속 미투를 한 것이었다"며 "수십년의 과정을 거쳐 피해자의 목소리에 한국 사회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유명인 피해자들이 부각되는 아쉬움이 있는데 유명과 무명을 떠나서 한 인간이 겪는 피해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남역 사건, 페미니즘 대중화 이끌어
점차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해
미투, 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어떤 모습으로 건 반성폭력운동 함께
올해 계획했던 지리산 종주는 취소되었지만 동네 산행으로 마음을 달래는 이미경 소장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올해 계획했던 지리산 종주는 취소되었지만 동네 산행으로 마음을 달래는 이미경 소장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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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나 결혼 35주년, 만난 지는 4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소장과 성장을 함께 해준 고맙지만 약간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존재다. 그는 "우린 부부이자 친구인데 가정에서 가사노동은 여성의 것이란 기존의 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왔다"며 "가끔 내가 비겁한 것 아닌가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넘어간 부분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남편은 이 소장을 믿고 지지해준다.


내년, 이 소장은 임기가 종료된다. 상근 활동가가 아닌 어떤 모습으로도 반성폭력 운동은 함께 할 거라고. 이제껏 살아온 활동가의 삶을 돌아보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의지도 보였다.


"역사는 기록된 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운동가로서 제가 느꼈던 중요한 사건들, 그때의 사회가 어땠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얘기 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여성의 역사는 잘 흩어지기도 하고…. 현황에 대응하느라 놓쳤던 부분들이 있는데 이번엔 흩어지지 않게 한 번 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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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장의 활동명 '지리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굳건히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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