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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리지'…친부 살해 '美 리지 보든 사건' 각색
여배우 4명의 고음+강렬한 전자기타 소리 관객 압도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강렬한 전자기타 음향, 끝 모르고 치솟는 배우들의 고음. 뮤지컬 '리지'의 무대는 폭발적이다.


'리지'는 보기 드문 록뮤지컬이다. 무대에 오르는 인물은 여배우 네 명 뿐이다. 네 여배우는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의 주인공 할리 퀸(마고 로비)과 그의 동료들처럼 거침이 없다. 두려움 없이 고음을 내지르며 무대를 장악하고 객석을 압도한다.

6인조 라이브 밴드가 만들어낸 강렬한 록음악과 넘버(뮤지컬 삽입 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느낌이 든다. 록음악에 실린 넘버들은 강렬한 잔상을 남기고 성스루(sung-through·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된 뮤지컬) 뮤지컬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착각도 일으킨다. '리지'는 친부 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독보적인 매력의 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사진= 쇼노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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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는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에서 발생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폴리버의 부유한 노부부 앤드루 보든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애비 보든이 자택에서 도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앤드루의 둘째 딸 리지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리지는 당시 32살이었다. 사건 당시 9살 위인 언니 엠마는 집에 없었다. 리지·엠마는 앤드루가 사별한 첫째 부인과 낳은 딸이었다. 두 딸은 아버지가 계모에게 재산을 상속하려는 게 분했다. 여러 정황상 리지가 살해할 동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법정에서 리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극에서는 주인공 리지와 엠마, 리지의 친구 앨리스 러셀, 보든가(家)의 가정부 브리짓 설리번까지 네 명이 등장한다.

극의 배경이자 실제 사건 지역이 매사추세츠주라는 점은 흥미롭다. 매사추세츠주는 영국국교회의 종교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건너간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밟은 미국 땅이다. 매사추세츠주는 오늘날에도 엄격한 도덕과 규율을 중시하는 청교도의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친부 살해의 비윤리적 행위라는 의혹으로 미국 전체를 뜨겁게 달궜다. 일간지 보스턴글로브는 1892년 9월2일자에서 1면 오른쪽 절반과 6·7면까지 모두 세 개 면을 리지 사건 심리 기사로 채웠다.

[사진= 쇼노트 제공]

[사진= 쇼노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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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쇼노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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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당시 리지 보든 살인 사건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앤드루는 아들을 원했지만 딸들이 태어났다. 그는 막상 딸들이 태어나자 막내 리지를 특히 사랑했다. 리지에 대한 그의 집착은 성적 학대라는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 리지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리지의 반항심은 친구 앨리스를 향한 동성애적 감정으로 연결된다.


아버지에 대한 리지의 반항심을 표현하기 위해 록음악이 선택한 것은 효과적인 전략인 듯하다. 아버지가 당시 청교도적 규율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데까지 해석의 외연이 넓혀지면 더욱 그렇다.


극은 억압된 자들 모두 와서 해방감을 만끽하라는 듯 공연 내내 강렬한 록음악의 비트로 이어진다. 제작사 쇼노트는 관객들에게 공연 내내 귀가 뻥 뚫리는 짜릿함을 선사하기 위해 캐스팅에 신경 써 최강의 보컬리스트들만 모았다고 밝혔다. "1892년 어느 미친 여름날"이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극의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가 쓴 매사추세츠주 배경의 희곡 '시련'과 비교해보는 것도 '리지'를 해석하는 유효한 도구일 수 있다. '시련'은 미국의 초기 역사에 오점으로 남은 '세일럼의 마녀 재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정확히 200년 전인 1692년에 발생했다. 사건이 벌어진 세일럼은 1752년 마을 이름을 댄버스로 바꿨다. 댄버스에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이 벌어진 폴리버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만큼 가깝다.

[사진= 쇼노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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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세일럼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마녀로 지목하면서 200명 이상 투옥되고 19명이 교수형당하는 등 총 25명이 목숨까지 잃은 사건이다. 리지 보든 살인 사건보다 200년 앞선만큼 청교도적 윤리와 규율은 훨씬 강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웃을 비도덕적이고 규율조차 지키지 않았다며 마녀로 마구 지목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증언과 의혹만으로 숱한 사람이 처벌받았다. '시련'은 밀러가 매카시즘의 광기를 폭로하고자 1953년에 쓴 희곡이다.


'리지'에서 리지가 부모 살해 후 엠마와 함께 광기에 사로잡히는 장면은 '시련' 속 광기어린 마을 소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일럼의 마녀 재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리지는 친부를 살해한 마녀였을 수도 있는데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리지는 무죄로 풀려난 뒤 마을 사람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폴리버에서 66세까지 살다 숨을 거뒀다. 엠마는 동생이 죽고 9일 뒤 세상을 떠났다. 두 자매 모두 결혼하지 않았다.


'리지'는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오는 6월 21일까지 공연한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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