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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 악의 특별함과 조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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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

허윤 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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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평범했다. 머리에 뿔 나고 등에 날개 달린 무서운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연말 술 한잔을 같이 했던 친한 동생과도 닮았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와도 어울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 봉사단체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n번방 조주빈은 그러했다. 독일 나찌 중령 아이히만도 비슷했다.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 유대인을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해 학살했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에 숨어살던 그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중년의 평범한 백인 남성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도덕적인 가장이었다는 주변 진술은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이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설명했다. 유대인 학살은 악마성 때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생각 없이 수행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의 악은 평범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전쟁 후에도 나찌 잔당들과 함께 국가사회주의 재건을 획책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반복해 드러냈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이러한 아이히만에 속아 범죄 자체가 아닌 '악은 평범함에서 나온다'는 구조적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도록 했다.

n번방 문제에서도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습은 변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 현상, 술 문화, 성희롱 문제 등이 n번방과 조주빈 사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주빈의 범죄는 평범함에서 나온 악이 아니다. 사기ㆍ협박ㆍ유포ㆍ살해모의 심지어 성폭행 교사 혐의는 평범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피해자만 70여명이 넘고 미성년자가 20여명에 이르며 손석희 JTBC 사장 등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도 피해가지 못했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나름 의미가 있다. n번방 관련자를 모두 범죄조직으로 엮어서 처벌하겠다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말이나, n번방 관련자 26만명의 신원을 전원 공개하겠다는 한상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발언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처벌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상태에서 이는 레토릭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사안인 범죄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소홀하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과 악마 간 차이점을 거론하며 26만명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두를 처벌하겠다는 구호보다, 반드시 필요한 처벌과 정의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미 n번방 관련 범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있다. 켈리로 알려진 신모씨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가볍게 처벌될 것으로 예상된다. n번방의 전 운영자 와치맨도 음란물 유포방을 운영하다 재판에 넘겨졌는데 구형은 3년6개월에 불과했다. n번방 범죄의 시초인 갓갓은 아직도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주동자 몇 명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자 처벌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지난해 성매매 알선 사이트 '밤의 전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사람은 운영진과 관리자 몇 명뿐이다. 다크웹 아동 포르노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사건에서도 운영자는 1년6월만 교도소에 있으면 된다. 17년 만에 폐지된 '소라넷' 운영자 역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이들 모두 조만간 출소한다. 악은 평범하지 않고 특별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에게 특별한 법의 심판이 신속하고 명확하게 가해져야 한다. n번방 관련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나치게 범위를 확대하여 결국 아무 것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윤 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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