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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소련조차 흉물스러워 했던 '베를린장벽', 왜 세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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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이후 베를린을 둘로 쪼갰던 냉전의 상징이자 올해 붕괴 30주년을 맞은 베를린장벽의 모습(사진=블룸버그뉴스)

1961년 이후 베를린을 둘로 쪼갰던 냉전의 상징이자 올해 붕괴 30주년을 맞은 베를린장벽의 모습(사진=블룸버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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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2019년 11월9일은 과거 냉전체제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진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 세계에서 당시의 감격을 다시 조명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각종 분쟁과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역으로 분류되는 한반도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보통 베를린장벽이라하면 2차대전 전후 독일이 패망과 함께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쪼개졌고, 동독 측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이탈주민을 막기 위해 지어진 장벽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실제 이 장벽의 탄생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좀더 시계열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 베를린장벽이 상징하는 냉전구도는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러시아에 구소련이 들어서는 1920년대 이후부터 예상됐던 일이었다.

1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는 동유럽의 거대한 강대국들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수십개로 쪼개놓았다. 특히 역사기간 내내 중부유럽 일대에서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해왔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급격한 세력 축소는 서유럽 국가들에게 또다른 문제로 다가왔다. 즉 공산화 된 거대한 소련 세력을 막을 방파제 역할을 할 국가가 없어졌다는 문제였다.


2차대전 막바지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의 모습. 소련군은 나치독일과의 전투에서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며 베를린에 단독입성하는데 성공했으나, 전후 베를린 역시 분할 대상이 되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4분할 된다.(사진= https://gov.uk)

2차대전 막바지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의 모습. 소련군은 나치독일과의 전투에서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며 베를린에 단독입성하는데 성공했으나, 전후 베를린 역시 분할 대상이 되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4분할 된다.(사진= https://gov.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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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합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살아남은 국가가 1차대전의 원흉이라 불리던 독일이었다. 독일은 옛 프로이센 제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으나, 대부분의 영토와 8000만명에 이르는 국민들을 그대로 보전받게 됐고, 사실상 최전선에서 소련과 맞서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역학 구도 속에서 공산당을 극도로 증오하고, 동방으로 진출해 소련을 정복할 것이라 공언하던 히틀러의 집권과 그가 펼친 독일의 재군비 정책은 영국과 프랑스의 묵인 하에 추진될 수 있었다. 이미 독일은 이때부터 냉전체제의 최전선으로 인식됐던 셈이다.


사실 유럽 내 냉전 구도만 놓고 봤을 때 2차대전 이후 달라진 점은 최전선이던 독일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둘로 쪼개졌다는 것 뿐이었다. 전쟁 직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4분할 됐던 독일 영토는 미,영,프가 각자 점령지를 합쳐 서독을, 소련이 자국 점령지에 위성국가로 동독을 세우면서 둘로 쪼개졌다. 그런데 이 독일 분할 과정에서 베를린 분할이 문제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2차대전 중 유럽전선이 종결된 1945년 5월 당시 베를린은 소련이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고, 미국, 영국, 프랑스군과 소련군은 베를린보다 훨씬 서쪽인 엘베강에서 만나면서 전쟁이 종결된 터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중심거점이었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소련 단독 점령에 대해 다른 연합국들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베를린도 전후 독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이 분할 점령했다. 이로인해 서독의 상징적 수도인 서베를린시는 동독 땅 한가운데 위치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됐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직접 장벽 철거에 나선 독일 시민들의 모습(사진=AP연합뉴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직접 장벽 철거에 나선 독일 시민들의 모습(사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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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독일의 분할 이후에도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월경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1961년 8월, 동독에서 서베를린시 전체를 둘러치는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이른바 '반파시스트 장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란 이름을 붙이게 됐다. 하지만 소련에서조차 매우 흉물스럽다는 평가를 받았고, 동독 내부는 물론 다른 공산권 국가들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체제경쟁의 패배를 인정한 상징물이 됐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건축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 흉물스런 건축물은 붕괴될 때조차 한편의 코미디와 같은 상황으로 무너지게 됐다. 1989년 11월, 동베를린 측에서 여행자유화 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독일어를 잘 몰랐던 이탈리아 기자가 전 세계에 오보를 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동베를린 국경개방이 즉시 시행된다는 오보는 전 세계로 퍼졌으며, 이 뉴스를 보고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중장비까지 몰고 와 전 구역의 베를린장벽을 허물어버렸다.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은 너무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아예 수비를 포기했고, 베를린장벽은 순식간에 붕괴됐다. 사실 이미 이런 오보 하나로 무너질 정도로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재정이나 국가상황은 엉망진창인 터였다.


그럼에도 유럽의 동서 갈등은 신냉전의 바람을 타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가 세력 회복에 나서면서 동유럽 전역을 중심으로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기지와 러시아의 S-400 미사일 기지가 양분, 전선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독일은 나토의 중심국가로 또다시 서구권의 주요 방파제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제는 중동까지 함께 맞물리며 돌아가게 된 신냉전의 구도가 또 어떠한 역사를 써내려가고, 어디에 또다른 베를린장벽을 세우게 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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