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Economia]고려 상인들은 왜 상감청자를 중국에 팔지 않았을까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김영제 단국대 교수 '고려 상인과 동아시아 무역사'

[Economia]고려 상인들은 왜 상감청자를 중국에 팔지 않았을까
AD
원본보기 아이콘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년)'의 주 무대는 국제무역항 벽란도다. 고려가 멸망하면서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 영화에서는 전성기가 끝나갈 즈음이다. 시장에 각양각색의 천막을 세운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아낙네부터 터번을 쓴 이슬람 상인까지 손님들로 북적인다. 장사정(김남길)과 여월(손예진) 패거리는 여기서 처음 만난다. 여월의 오른팔인 흑묘(최진리)는 먹음직스러운 떡을 보고 군침을 삼킨다. 맞은편에서 장사정과 스님(박철민)은 꼬치구이를 뜯어 먹다가 어디론가 이동하는 오랑우탄, 코끼리, 기린 등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시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고려 상인이 중국에 수출한 상품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경원부 지방지 '보경사명지(1228년)'가 대표적이다. 귀금속, 약재, 문방구, 나전칠기, 수공업품 등을 설명한다. 조언위가 쓴 '운록만초(1206년)'와 조여괄이 적은 '제번지(1255년)'도 비슷한 물품들을 소개한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고려산 종이는 송의 수도나 항구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의 내지에 이르기까지 유통됐다. 김영제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고려 상인과 동아시아 무역사'에서 이 상품들이 어느 정도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핀다. 다양한 문헌에 근거해 당시 활성화된 교역의 실태를 파악한다.

보경사명지는 고려 상품들을 세색(細色)과 추색(?色)으로 나눠 전한다. 세색은 가볍고 가격이 비교적 많이 나가는 상품, 추색은 부피가 큰 상품을 각각 통칭한다. 엄밀히 말하면, 북송 말 휘종 대 대관 연간에 이르러 송조는 부피가 커서 지금까지 추색에 포함되어 있던 각종 전매 상품들을 대부분 세색에 포함시켰다. 이 조치로 인해 이후 남송 말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세색은 값이 비싼 것, 추색은 값이 싼 것을 각각 가리켰다. 세색으로는 은, 인삼, 사향, 홍화, 복령, 밀랍 등이 있다. 대포, 소포, 모시포, 명주, 잣, 송화, 밤, 대추, 추자 열매, 은행 열매, 산수유, 백부자, 무이, 감초, 나전, 피각, 구리그릇, 호피 등은 추색으로 분류됐다. 값비싼 세색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추색의 종류가 훨씬 많았다.


[Economia]고려 상인들은 왜 상감청자를 중국에 팔지 않았을까 원본보기 아이콘


보경사명지는 추색으로 분류한 모시포에 대해 "품질이 아주 좋은 것을 시라 하는데, 옥과 같이 매우 희며, 왕과 귀인들이 모두 옷을 해 입는다. 경원부에 오는 것은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당시 고려에서 상등품의 모시포가 생산되고 있었음에도 남송 중기에 경원부에 수출된 것은 값싼 하등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보경사명지는 또 다른 추색 상품인 명주에 대해 "그 원료인 실과 천은 모두 산동이나 복건, 절강의 상인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다"고 기술했다. "화릉(꽃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비단)을 아주 잘 짰으며, 문라(무늬가 화려한 비단), 긴사(발이 굵은 비단), 금계(비싼 깔개) 등도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서긍의 '고려도경' 권23, 토산 항목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며 "이처럼 고려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실을 가지고 고급 비단제품도 생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상인들은 남송 중기에 값싼 명주와 무늬가 없는 비단을 경원부나 천주에 팔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고려가 중국으로부터 생사(비단실)를 수입해 국내에서 여러 종류의 고급 비단을 생산하고 있었음에도, 이때 남중국에 팔고 있었던 것은 값이 싸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구리그릇이 추색에 들어간 이유도 마찬가지다. 당시 고려에서는 고급품인 상감청자가 한창 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경사명지의 세색 항목에서 이 물건은 찾을 수 없다. 김 교수는 "송나라도 당시 자기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태학과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질그릇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자기그릇이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값싼 자기에 대한 많은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고려가 여러 가지 값비싼 상품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바다를 통해 남송대 경원부나 천주에 팔고 있던 것은 공통적으로 값싼 상품들이 많았다는 주장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