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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이순신 12척' 가능케 한 '배설' 장군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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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참패에서 12척 건졌으나... 도주한 죄로 처형
전후 반란 도모한단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미스터리한 행적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진도 울돌목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모습(사진=연합뉴스)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진도 울돌목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모습(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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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 심해질 때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나오는 이 전설적인 구절은 늘 등장하곤 한다. 해당 구절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7년, 칠천량해전 패전 이후 아예 수군을 폐지하자던 조선조정에 보낸 상소문의 일부다. 이 장군은 이후 명량해전에서 이 12척의 배로 왜선 300여척을 무찌르는 세계 해전사에서 기적이라 불리는 대승을 일궈낸다.

그런데 왜 하필 12척이 남게 됐을까? 사실 이 12척은 조선 수군 사상 최악의 참패로 알려진 칠천량해전에서 유일하게 파손을 면한 배들이었다. 칠천량해전에 참전했던 한 장수가 참패를 예상하고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퇴각한 뒤 배들을 숨겨놓았던 것. 이순신 장군의 12척 기적의 밑바탕이 된 이 배들을 숨긴 인물은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배설(裵楔)이란 장수다.


따지고보면 명량대첩의 매우 중요한 기초를 다진 인물이지만, 그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광의 주역으로 비춰지지 못하는 이유는 명량대첩 직전에 도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칠천량해전에서 겪은 공포심 때문이었는지, 본인의 주장처럼 배멀미가 정말 심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투 직전 도주했다. 이후 전쟁이 끝난 1599년, 권율장군이 수배령을 내린 끝에 그의 고향이던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돼 처형됐다. 그의 신원이 복원된 것은 처형당한지 6년이 지난 1605년의 일이었다.


배설 장군은 칠천량해전 직전 패전을 직감하고 손실을 막기 위해 전선을 이탈, 이후 남해안 각지를 돌며 백성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전선을 수습한 뒤 다시 복직한 이순신 장군에게 파손되지 않은 12척의 배를 인계해 명량대첩의 불씨를 살린 인물로 알려져있다.(사진=영화 '명량' 장면 캡쳐)

배설 장군은 칠천량해전 직전 패전을 직감하고 손실을 막기 위해 전선을 이탈, 이후 남해안 각지를 돌며 백성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전선을 수습한 뒤 다시 복직한 이순신 장군에게 파손되지 않은 12척의 배를 인계해 명량대첩의 불씨를 살린 인물로 알려져있다.(사진=영화 '명량'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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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기묘한 이력을 가진 배설 장군은 사실 처음부터 수군 장수는 아니었다. 1551년생인 그는 32세인 1583년에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상도 일대의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육전에서 그는 맹장이라 표현되며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와 견줄만한 인물로 묘사된다. 선조 29년 2월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조판서 김우옹(金宇?)이 선조에게 이야기 하기를 "만약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융무(戎務)를 총괄케 한다면 곽재우, 박진, 배설 같은 사람이 적임자일 것입니다"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수상전엔 익숙치 못한 장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배설이 원균과 인사교체로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선조 28년 2월의 기사에 선조가 직접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럼에도 배설은 경상우수사로서 함대를 구축하는데 힘썼으며, 칠천량해전 이후에도 수습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배설 장군은 칠천량해전 참패 이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무너지자 남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백성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각지의 무기고를 정리하는 등 수습작업에 나선다. 그러나 이후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배설장군은 계속해서 공포에 휩싸이는 인물로 등장하며 배를 타는 것조차 무서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명량해전을 앞두고 새벽에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실록에서도 선조 30년 10월 기사에 비변사가 아뢰길 "수사(水使) 배설(裵楔)이 주사(舟師)의 차장(次將)으로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쳤으며 이제 또 주장의 명령을 어기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으니, 정상이 지극히 미워할만하여 율에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 표현하고 있다.


배설 장군은 경상우수사인 원균과 인사교체를 하기 전까지 주로 육전에서 활약한 장수로 등장했으며, 수전에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실록에 묘사돼있다.(사진=KBS1 '임진왜란1592' 장면 캡쳐)

배설 장군은 경상우수사인 원균과 인사교체를 하기 전까지 주로 육전에서 활약한 장수로 등장했으며, 수전에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실록에 묘사돼있다.(사진=KBS1 '임진왜란1592'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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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이후 배설 장군의 행적이다. 그는 도주 이후 고향인 선산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도주 당시 이 지역은 곳곳이 왜군들의 점령지가 있어 통행이 쉽지 않았다. 전투가 무서워 도망갔다는 그가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고향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더 의아한 것은 전후 그가 반란을 도모하려했다는 의혹을 사게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직후인 선조 31년 12월 기사에는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이 아뢰기를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며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라고 선조에게 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배설에게 수배령이 내려지고 서울로 압송, 처형된 주된 이유는 이 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불과 6년 뒤에 다시 공신으로 신원이 회복되는 것으로 봐서 확실히 반역죄의 증거가 있었다기보다는 도주의 죄를 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의 맹장에서 수군의 졸장으로, 명량대첩의 숨은 주역 중 한명에서 대역죄인으로 부침이 심했던 배설장군의 일대기는 여전히 임진왜란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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