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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9] 로마의 아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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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밤에 잘 때만 모입니다. 어떤 새는 멀리 날아가 한참을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도 실감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잠잘 때만 모이는 삶’입니다. 새장 같은 아파트의 14층 둥지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저마다 일터로 날아갑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요새에 산다는 게 비둘기나 까치와 다를 뿐, 우리는 새들입니다. 텃새도 철새도 아닌 새. 고고함을 잃어버린 생명.


영국의 시인 T.S.엘리어트(1888~1965)는 현대인을 ‘머릿속에 지푸라기만 가득찬 공허한 인간’이라고 노래하지만, 21세기의 인간은 ‘프로그램 된 인간’인 듯합니다. 입시, 학점, 취업, 결혼, 육아, 과제, 성과, 실직, 노후자금, 요양병원… 끝없는 경쟁의 원리가 생로병사의 전 주기에 걸쳐 작동하지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비슷합니다.

원래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요. 그것이 새의 본성입니다.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을 읽은 지 40년이 되어 갑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그 갈매기의 자유로운 비상(飛上)을 노래한 팝 가수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Be'가 솟아오르기도 하네요. ‘노래해요. 고요한 목소리를 찾는 음악으로 노래해요. 그러면 신은 당신의 길을 만들 거예요.’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하는 새가 아닌 창공을 비상하는 새. 정신의 자유를 이룬 부처나 예수의 상징이 아닐까요? 체제나 관습의 한계를 돌파하는 단독자의 자유. 그 자유 앞에 있는 난관이 바로 집과 가족입니다.


떠돌이 행인은 집과 가족을 떠나서 홀로 가는 존재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게 ‘인간(人間)’의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범위를 확장해 ‘세간(世間)’이라고도 합니다. 그 세간을 떠나 진리를 탐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출세간(出世間)’이라 하고, 깨달음을 이룬 뒤 다시 돌아와 세간 구하는 일을 하는 곳을 ‘출출세간(出出世間)’이라 하지요. 홀로 가서 ‘정신의 새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만나는 가족. 집과 가족은 그렇게 거듭나야 하고 새롭게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부처나 예수의 유전자가 있다면 말입니다.


로마에 있는 동안 아파트를 구합니다. 한 도시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집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사람은 본래 집에 있으면 떠나고 싶고, 떠돌아다니면 집에 가고 싶습니다. 그네를 보면 발판을 굴러 하늘 높이 오르고 싶고, 한참을 타다 보면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싶은 심리와 같지요. 인간 본성입니다. 이제 한 번쯤 본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합니다. ‘여행하면서도 집에 있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떨어져 살던 딸이 합류합니다. 6년만인가 봅니다. 아내는 가족을 중시합니다.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가족 공동체는 영혼의 동반자[soul mate]입니다. 딸아이는 다릅니다. 그녀는 독립된 자아가 중요합니다. 가족은 어쩌다 함께 살아도 단순 동거인[house mate]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와 자녀 사이에 놓여 있는 ‘작별의 강물’일 테지요. 아이들이 다 자라면 품에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종이 겪어 온 진화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단독 여행자. 가족도 저마다 다른 길을 걷는 여행자입니다. 저녁 둥지에 모인 새들처럼,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살아봅니다. 여행 중의 로마 아파트. 함께 잠자고 함께 생활한다는 게 무엇인지, 세 사람 모두 애틋하고 즐겁습니다. 말도 많아집니다. 누구는 ‘어디를 가볼까?’가 관심이고, 또 누구는 ‘무엇을 먹을까?’가 중요합니다. 다른 누구는 두 사람 뜻을 맞추기로 합니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합니다. ‘천천히 놀자!’


계약한 아파트로 갑니다. 로마 기차역 근처에서 10분 거리. 1주일 지낼 집입니다. 훤칠한 이태리 남자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은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살림 살기 좋게 모든 게 갖춰진 집.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식기세척기…. 창문 밖 중정(中庭) 공간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이 재미있네요. 도르래가 달려 있습니다. 한국에선 사람이 움직여 빨래를 널지만, 로마 아파트에선 빨래가 햇볕을 쪼이러 공중 나들이를 합니다. 빨래들의 공중곡예. 그래도 실내 건조대에 널어 놓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 너머, 아이를 안고 있는 신혼부부가 손을 흔들어 환영해줍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저 선의(善意). 위층 사람은 부부싸움을 하는 듯 한창 시끄러운데, 건너편 가족은 낯선 이방인을 향해 미소를 보냅니다. 가가호호 달린, 한국산 에어컨 실외기보다 반갑습니다. ‘국가’보다 ‘사람’이 먼저 다가옵니다. ‘사람’보다 더 깊은 생각의 바다에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엔 저처럼 행복한 품 안의 사이였을 테지요. 떠돌며 머흘며 집에 깃들이어 보니 우리 가족도 저쪽 가족도 다 새롭게 보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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