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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더 강한 투쟁 하시라" 이희호, 김대중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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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구속과 가택 연금에도 절대 포기 권하지 않아
정보기관 감시 피해 보다 강력한 투쟁 주문하기도
DJ 사형 선고 받을 때 머리카락 한 움큼씩 빠지며 마음고생
역사적 고비마다 DJ 곁에 늘 함께 있어

이희호 여사 김대중후보 지원 연설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희호 여사 김대중후보 지원 연설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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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현재로써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


10일 97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희호 여사는 남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였다.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서슬 퍼런 군부 독재를 정면으로 맞섰다.

1972년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0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할 때 고 이희호 여사는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보다 강력한 투쟁을 주문했다.


1971년 대선 때는 직접 연단에 올라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이른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된 인생의 큰 시련이 왔지만, DJ가 지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이 여사였다.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이란 DJ가 일본 도쿄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당해 배로 끌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을뻔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미국 정부에 배의 위치가 알려져 김대중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초 속에서도 이희호는 남편에게 포기를 권하지 않았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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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도 훗날 아내에 관한 글에서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는 글을 썼다.


이 여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이 여사는 다른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1년 동안 석방투쟁을 벌였다. 당시 이 여사는 몸무게 43㎏까지 야위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이 여사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쥔 채 울었다고 한다.


1978년 연말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가택 연금을 당했다. 당시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동교동 교도소'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법정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법정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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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가 암살돼 군부독재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김대중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신군부는 김대중이 민주화운동가 20여명과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계획했다고 발표했다.


1980년 5월17일 또다시 연행된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장남 김홍일까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당시 이희호는 눈물을 삼키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던 무렵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까지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희호는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이 여사는 DJ가 옥중에 있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편지를 썼다.


사진은 19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사진은 19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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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안부 등 일상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격려 등을 담았다. 또 당대의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등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청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책도 한 두 권씩 꼭 전했다. 이 여사가 이때 쓴 편지는 1998년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당시 이 여사가 보낸 책은 600권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련의 세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청, 감청 등에 시달리다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고 난 뒤에야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 이희호가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1992년의 쓰라린 대선 패배,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등 역사적 고비마다 DJ 곁에는 늘 이 여사가 있었다.


한편 10일 노환으로 타계한 이희호 여사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 치러진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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