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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모던 하우스/고경숙

최종수정 2019.06.10 10:02 기사입력 2019.06.1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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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사다리 꼭대기가 15층 창문에 턱을 걸고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반복적으로 흔들면서 취급 주의를 당부했다

마당을 들고 오던 노모가 저지당하고

방2가 되었다

사내아이는 자청해서 방3이 되었다


평면적이 아닌 체적에 잔금을 치른 안주인은

방마다 문을 열어젖히고 취향대로

핑크, 아이스블루, 베이지 등 공기에 색을 입혔다

라벤더 향도 추가했다

거실이 광장이지?

활짝 열린 밸브는 흥분 상태로

원탁에 구성원들을 불러 모았다

화목하게 화목하게 밥을 먹었다


비밀번호를 여러 번 고쳐 누르고 반입된

방1이 밤늦게 합류했다

광장 바닥에 술에 취해 엎어진 채로,

안주인은 팔짱을 끼고 내려다봤다

방1의 손을 잡고 방2가 안타까워했다

날바닥에서 이러면 병 나,

비죽 고개 내민 방3이 밀실로 퇴장했다

광장엔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골목같이 축 늘어진 방1의 몸이, 시계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한 詩]모던 하우스/고경숙

■이 시는 어떤 가족의 이사 첫날의 모습을 좀 낯선 방식으로 쓴 것이다. 예컨대 "고가 사다리"가 "취급 주의를 당부했다"라든지 "마당을 들고 오던 노모"라는 표현 등이 그렇고, 남편을 "방1"로, 노모를 "방2"로, 사내아이를 "방3"으로 적은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와 같은 표현이나 호명은 시적 대상을 새롭게 혹은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를 요청한다기보다 시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메마르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마당이 있던 집이 그립다. 아무리 "광장"만큼이나 넓다고 해도 "날바닥" 같은 거실이 아니라 조붓하나마 알록달록 꽃들이 피고 장독들이 가지런하던 그런 마당이 있던 집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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