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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풀숲/조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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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풀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서 한 점 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풀은 미풍에도 한들한들 동요하고 있었는데 한 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한 점 풀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한 점 풀이 불어났다 내 눈 속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불어났다 미풍을 의심하는 동안 한 점 풀이 동공을 뚫고 올라왔다 눈에서 한 점 풀을 뽑는 동안 한 점 풀이 발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죽는 순간에도 조직의 얼굴을 모르는 점조직의 일원처럼 한 점 풀은 모르는 채 불어났다 한 점 풀은 뽑히면서 불어났다 점은 이동하지 않고 불어나는 것이고 자라지 않고 우거지는 것이라고 한 점 풀이 불처럼 번졌다 모르는 채 바랭이풀이 바랭이풀끼리 모여 있었다 모르는 채 쑥대가 쑥대끼리 모여 있었다 한 점 풀은 자라고 자라서 선분이 되지 않고 불길에 휩싸이듯이 점점 풀숲이 되어 갔다 풀숲에 가려졌다

[오후 한 詩]풀숲/조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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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시를 읽고 나면 일단 그 의미부터 궁금해한다. 예컨대 이 시에서 '풀'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런 질문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고, 언어는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당장 그 속내를 펼쳐 보이기 전에 자신 속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이 시를 두고 말하자면, '풀'은 처음엔 "한 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지만, 문득 "동공을" 그리고 "발바닥을 뚫고 올라"온다. 그렇게 '풀'은 "모르는 채" 불어나고 우거지고 "불처럼 번"지면서 "점점 풀숲이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그 "풀숲에 가려"져 버린다. 이처럼 당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하찮은 생각일 수도 있고, 못내 그리운 누군가일 수도 있고, 기억 혹은 정념이라고 규격화해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어떤 사로잡힘을 경험하게 되는데, 실은 그 경험이 시 읽기의 정체이자 보람이지 않을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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