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나무 의자/이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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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된 나무는 죽지 않는다. 수액이 바짝 마르는 동안, 누군가의 몸에 착 감겨 다정한 숨결과 체온을 나누며 그윽하고 평화롭게 깊어진다. 거쳐 간 모든 목숨붙이를 오직 몸으로 만나고 기억하고, 새겨 넣은 무늬와 상처 얼룩 몸짓은 세월을 더할수록 빛이 난다. 흘리고 간 미소가 잠깐 평온하다는 걸, 틈 마디마디에 낀 담배꽁초가 고단하다는 걸, 딱딱한 등받이 장기 매매 스티커가 변색되며 쓸쓸하다는 걸 안다. 문신 같은 '사랑'이란 글씨가 당신 몸에도 새겨진다는 걸, 자신 곁에 오래 머물수록 늙고 병들고 외롭다는 걸 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과 햇살 이슬 낙엽 고양이, 부지런한 개미 행렬과 사람들, 마시다 만 커피 잔과 소주병, 웅크린 팔베개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서늘한 수액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씩씩하게 다시 돈다는 것도 안다. 채워졌다가 텅 빌 때마다 희미한 광합성의 기억은 되살아나,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에서 담쟁이 뿌리가 돋는다, 그때 비로소 나무 의자는 스스로 살아 있는 나무란 증거를 남기며 차분히 늙어 간다.
■십일월이 가기 전에 나무 의자에 앉아 보자. 나무 의자에 앉아 그 서늘한 따스함들을 마주해 보자. 어떤 나무 의자엔 젊은 엄마가 아기를 어르던 다정한 봄날이 남아 있을 것이다. 봄날은 깊어 고양이 숨결처럼 꽃잎들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나무 의자는 어느 안타까운 연인들이 장대비 속에서 부둥켜안고 울었을 여름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나무 의자에 맺힌 옹이가 못내 붉은 이유다. 어떤 나무 의자엔 오래도록 기다리다 지친 마음이 새겨져 있을 것이고, 어떤 나무 의자엔 대출금 걱정을 하다 툭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들고 집으로 바삐 걸어가던 가장의 분주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 십일월이 가기 전에 나무 의자에 앉아 보자. 나무 의자에 앉아 "차분히 늙어" 가는 그러나 아직은 채 식지 않은 온기가 남은 우리의 한생을 더듬어 보자.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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